구로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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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구의 설치

 

구로구는 1980년 4월 1일 대통령령 제9630호에 의거 영등포구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구로 신설되었다. 그 중심지는 구로동의 한국수출산업공단이었으며, 이에 따라 수출공단이 많은 영등포구의 남부지역이 초창기 구로구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이 지역은 서울과 인천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지점으로서 교통의 중요한 요지이며, 60년대 이후 수출주도형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주도한 곳이기도 하다. "구로공단"이라는 대명사로 더욱 알려졌고, 우리나라 산업화의 모델을 제공하기도 하였던 곳이다.

 

서구의 다른 선진국들이 그러했듯이 우리나라의 근 · 현대화 과정에서 보인 특징 중의 하나가 농업사회로부터 공업사회, 산업사회로의 전환·발전이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즉, 토지공간을 이용한 농업위주의 생산활동으로부터 점차 벗어나서 산업화·공업화를추진하여 다량의 공산품을 제조하는 방향으로 큰 전환을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농산물을 생산하여 자급자족을 꾀한다기보다 우수한 공산품을 제작하여 이를 해외에 수출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아왔다. 이제 농사짓던 농촌 인구가 구로구 지역에 위치한 한국수출산업공단으로 모여들게 되어 구로구는 60년대 이후 인구의 급격한 증가추세를 보여 산업도시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수출산업의 급격한 성장으로 구로구 관내의 행정동이 증가되어 갔으며, 80년대 초 구로구는 구로동, 가리봉동, 시흥동, 독산동, 고척동, 개봉동, 오류동, 궁동, 온수동, 천왕동, 항동, 신도림동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1980년 7월 1일에 서울특별시 조례 제1413호 「동사무소설치조례」를 발표하여 가리봉1동을 가리봉1,3동, 독산2동을 2,4동으로, 시흥1동을시흥1,4동으로 개봉2동을 개봉2,3동으로 나누었고, 1985년 9월 1일에는 독산본동과 시흥5동이 신설되었고 1988년 7월 1일에는 구로본동이 신설되었으며, 1994년 11월 1일에는 개봉본동이 새롭게 만들어졌다.

 

한편, 80년대를 지나 90년대에 접어들면서 구로구의 인구는 급격하게 늘어나 이제 구로구 자체의 행정적인 효율화를 위해서라도 구로구의 분구문제가 거론되지 않을 수 없었고, 마침내 1994년 12월 22일에는 법률 제4802호에 의거 구로구로부터 금천구가 분리·독립되는 법적 근거를 마련되고, 1995년 3월1일을 기하여 금천구의 창설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구로구의 가리봉동 일부와 시흥동, 독산동 지역이 금천구로 편입되어 갔다. 그리하여 구로구는 현재(2020년 10월 1일 기준)구로 1,2,3,4,5,동, 가리봉동, 신도림동, 고척1동,2동, 개봉1,2,3동, 오류1,2동, 수궁동, 항동 총 16개 행정동과 10개의 법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시대 이전의 구로구 


한강유역은 한반도의 중심 지역으로서 기름진 평야지대일 뿐만 아니라, 육로, 수로의 교통 요지로서, 또 군사상 전략 요충지역으로 중요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삼국시대 이래 중요시 되어 온 것이다.

 

"구로동"이라는 동명의 유래는 옛날 이 마을에 노인 아홉 사람이 오랫동안 살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오늘날의 구로구는 과거 경기도 시흥군 상북면(上北面)과 동면(東面), 경기도 부평군의 수탄면(水呑面), 그리고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의 일부지역이 편입되어 이루어졌다. 즉, 시흥, 부평, 영등포가 합하여 구로구가 탄생된 것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삼국시대에는 본래 백제의 영토였으나, 점차 백제세력이 약화되고 고구려의 힘이 강성해져 그 전성기에 육박해질 무렵, 고구려의 장수왕은 백제 세력을 몰아내고 한강 이남쪽으로 남하정책을 취하면서 이 곳을 중요시하여 이 지역에 잉벌노현(仍伐奴縣 : 지금의 시흥시와광명시지역), 율목군(栗木郡: 지금의 과천시), 장항구현(獐項口縣 또는古斯也沕欠: 지금의 안산지역)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통일신라의 신문왕대에 9주제(九州制)를 정비하면서 이곳은 한산주(漢山州)에 속하였고, 경덕왕 16년(757)에는 한산주가 한주(漢州)로 바뀔 때, 잉벌노현은 곡양현(穀壤縣)과 장구현(獐口縣), 율진군(栗津郡)으로 고치고, 곡양현을 율진군의 영현(嶺縣)으로 삼았다.

 

고려 건국후 태조 23년(940)에는 곡양현을 금주(衿州 혹은 금주)로, 율진군은 과주(果州)로, 장구현은 안산현(安山縣)으로 고쳐졌다. 그런데 고려 성종 14년(995)에 지방제도를 대폭 개편하여 도제(道制)를 실시할 때, 관내도(關內道)에 소속시킨 이 지역(금주)을 다스리는 지방관으로 단련사를 두었다가 목종 8년(1005)에 혁파하고, 현종 9년(1018)에는 5도양계 제도를 도입하여 지방제도를 정비할 때, 개경 주위에 경기(京畿)를 설치하여 개성부를 포함 모두 10개의 현으로 구성하였다. 이때 구로구 지방은 경기 10현 중의 하나인 수주현(樹州縣)이었다. 이 지역은 문종23년(1069)에는 더욱 확장되었고, 명종 2년(1172)에는 감무를 설치하였다.

 

한편,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부평군 소속의 궁동, 온수동, 개봉동, 오류동, 항동, 천왕동 지역은 대체로 안양천 서쪽에 해당되는데, 일찍이 삼한시대에는 54개 읍락국가(성읍국가)중의 하나인 우휴모탁국(優休牟啄國)이었고,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는 백제령주부토군(主夫吐郡)이었으나, 이 곳이 고구려에 병합된 후에도 주부토국으로 호칭되었다.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에는 나라의 문물제도를 당나라식으로 고치도록 하였는데, 이때 9주 중 한주(漢州)에 예속되었다.

 

 

                           근세 이후의 구로구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곳은 어떻게 발전하였는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조선 태종 13년(1413)에 지방제도를 본격적으로 개편할 때, 금주(衿州)는 금천현으로 개명하고, 과주는 과천현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당시 군이나 현에 주(州)자가 든 고을을 모두 산(山)이나 천(川)으로 고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금천현은 태종 13년에 과천현과 병합하여 금과현(衿果縣)으로 하였다가 2개월 후에 혁파하였고, 또 양천현과 병합 금양현(衿陽縣)으로 하였다가 1년 뒤에 다시 금천현으로 고치고 현감을 두었다. 그리고 세조2년(1456)에는 금천현이 과천에 병합되었다가 곧 복구되었고, 정조19년(1795)에는 금천현의 지명을시흥현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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