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기본현황
주거
구로구의 총 면적은 20.12㎢이다. 16개의 동으로 구분되었으며 629개의 통과 4,926개의 반으로 나뉘어져 행정이 실시된다. 구로구의 중심을 이룬 구로리(구로리)와 도림리(도림리)는 1949년에 이르러 경기도시흥군으로부터 영등포구로 편입, 서울시에 속하게 되었다.
구로구가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크게 변화하게 된 계기는 1971년,구로동에 처음으로 공영주택, 간이주택, 공익주택 1천여채가 건축되면서 부터이다. 특히 구로공업단지의 전신인 구로수출공업단지가 들어선 것도 이때의 일로서 주목할 사항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지역은 대부분 논과 밭 그리고 야산으로서 순박한 시골의 모습 그대로였다.
구로구는 경인공업단지의 중간 지점에 해당된다. 즉 영등포구와 인천의 가운데 위치하면서 많은 공장들이 들어차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곳은 70년대에 주거 지역, 공장 지역, 농촌 지역으로 확연히 구분 지을 수 있었다.주거지역이라고 해도 도시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문화시설이 극히 빈약하였고 3차 산업과 같은 시설물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었다.
주거 지역으로는 독산동, 구로동 시흥동, 개봉동의 일부인데, 그중에서는 개봉동이 가장 잘 정리된 주거 환경 지역이고 구로 지역의 새로운 아파트 촌으로 부각된 곳은 시흥동이었다. 이곳에는 70년대 말부터 주식회사 한양주택의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아파트 주거 지역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인구
구로구의 공장지역은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가 들어선 구로동과 가리봉동이 그 중심을 이루었는데 이곳은 영등포 공업지역과 연결되어 공장지대로서의 인상이 더욱 강화되었다.
구로동, 가리봉동, 독산동, 시흥동, 고척동 개봉동, 오류동, 궁동,온수동, 천왕동, 향동, 신도림동,등에 거주하는 구로구민의 상당수는 구로구 공장지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으니, 그들 거주민의절반이상이 공장노동장들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타지역으로부터 공장취업을 위하여 이곳으로 유입된 젊은 층이 많다는것을 알 수 있다. 1966년, 1970년, 1975년의 인구조사 결과 서울에서 평균나이가 가장 낮은 곳이 구로구의 고척동과 영등포구의 대림동이라는연구논문이 나온 바도 있다.
고척동은 특히 34세 미만이 전체의 63.6%이고, 대림동은 34세미만이 57.1%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통계는 분명히 공장지대라는 특수성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생각된다. 가리봉동에는 15세 이상 24세까지의 남자가 전체 남자의 44.4%이고 여자는 15세 이상 19세까지가 전체 여성의 33.1%를 차지하였는데, 이는 이곳 공장 남녀노동자들이 이곳에 주로 모여 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편, 최근에도 구로구의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편리한 교통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개봉동과 시흥동에 인구증가가 두드러지는데, 이곳이 경인 · 경수간의 철도가 모이고 갈라지는 곳이기 때문에 직장 출퇴근가 관련이 가장 큰 이유이고, 오류동, 독산동,시흥동에 인구가 크게 늘어나는 것은 이곳에 시가지 조성이 촉진되고 있기 때문이다.
구로구의 인구는 ’95년 3월 금천구와 분구 당시 38만 1천명으로 시작하여 ’97년말에는 신도시 이전추세에 따라 37만 5천명으로 ’95년 대비 6,000명이 감소 현상을 보였으나, 공장이전 및 재개발에 따른 아파트의 입주로 인구가 점차 증가하여 2015년 12월말에는 인구 422,857명(남자 210,852, 여자 212,005)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산업
산업의 실상은 어떠한가? 구로구가 다른 구에 비하여 특기할 사항은 산업기지로서의 역할이라 하겠다. 구로구에는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의 제1단지, 제2단, 제3단지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대규모의 공업단지가 이곳에 마련될 수 있었던 점은 교통상 이점이 있고, 풍부한 물줄기, 풍부한 노동력 그리고 공장을 지을 땅값 등 유리한 조건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특히 구로구에는 동쪽으로 영등포구와 경계를 이루면서 도림천이 흐르고 있고, 서쪽으로는 경기도와 경계를 이루면서 안양천이 흘러 한강에 유입한다. 도림천과 안양천은 공업단지 조성에 좋은 입지적 조건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구로구의 공업단지는 부평공업단지 및 인천공업단지(인천구 북구)와 함께 경인수출산업공업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구로구의 공업단지는 구로동에 1단지, 가리봉동에 제2, 제3단지가 마련되어 있었다. 즉, 한국수출산업의 견인차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에 높은 긍지를 가질 수 있다.
구로구에서 본격적으로 공업단지가 형성, 발달한 것은경제개발5개년계획이 마련되고 이것이 강력하게 추진된 1965년부터이다. 이곳은 철도 · 도로 · 에너지 · 공업용수 · 노동력 등의 여러조건이 최적의 알맞은 곳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에 쉽게 역사 무대에 등장할 수 있었다.먼저「수출산업공업단지 개발조성법」이 1964년에 제정되었고, 이 법에따라 1965년에 제1수출산업공업단지 13만 8천평이 지정되었고,1967년에는 제2수출산업공업단지가, 1970년에는 제3수출산업공업단지가공업용지로 지정되었다.
제1단지는 구로동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1967년에 완성되었다.당시 대부분의 토지는 국유지였으므로 공업용지 취득이 용이하였고 인근하천으로부터 지하수를 공업용수로 공급받을 수 있었다. 교통문제도 유리하여 경부선, 경인선의 철도와 경부 · 경인의 양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고 인천항까지도 불과 25km밖에 떨어져 있지 아니하여 철도, 도로,항만 시설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제2단지와 제3단지는 가리봉동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서, 2단지는 1972년에, 3단지는 1976년에 각각 준공되어 한국의 경제발전에 크게 공헌 할 수 있었다. 당시 제1단지에는 섬유제품과 전자제품을 생산하는 51개 업체가 있었고 제2단지에는 봉제와 전자제품을 생산하는 61개업체가 생산 활동에 임하였으며, 제3단지에는 봉제를 주로하는삼성물산과 전자제품을 많이 만들던 금성사(LG의 전신)등 모두 149개업체가 산업역군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 3개단지 업체를 종합하여볼 때, 전자제품을 제작 · 조립하는 업체가 전체의 32.8%로 가장 많았고,그 다음이 의류 · 봉제 같은 섬유 제품 업체인데 전체의 28.7%이었으며, 그 나머지는 제지 · 인쇄 · 석유화학 · 카메라 · 장난감 · 피혁제품 등 다양한 형태였다.
구로구에는 3개 수출산업공업단지 지역 이외에 구로동, 시흥동,고척동, 신도림동, 오류동, 개봉동 등지에도 공장이 많이 분포되어있으니, 동신화학, 동일제강, 애경유지 등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서울시 전체 금속 · 기계공업 공장 수의 26%가 구로구에 위치해 있고 종업원 수도 서울 전체의 47.2%를 차지하고 있었다.
구로구에 이렇듯 많은 공장이 집중적으로 들어서 생산활동을함으로써 외형상 적지 않은 문제점도 나타났다. 그 중 공장폐수가안양천으로 배출되어 수질을 크게 오염시켰을 뿐만 아니라, 공기 또한 심하게 오염됨으로써 환경파괴 문제가 심각한 상태로 대두 되었으며,또한, 수만명의 공장 종업원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살게되자주거환경문제, 휴식공간문제, 생활필수품 조달을 위한 상가문제,유흥업소문제 등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하였다.
한편, 구로구의 문화시설은 어떠한가? 이 지역은 본래 1960년대까지는 도시라기보다는 조용한 한촌으로 대부분 지역이 야산과논밭이었으나, 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점차 인구가 집중되어 도시화가 촉진되었다. 그러므로 이곳 구로구는 서울의 다른 자치구와 달리전통적인 문화시설이나 문화재 등이 적었다. 그러나, 80년대에 들면서 경제성장과 함께 문화복지시설분야에 관심이 중대되어 교육시설, 사회체육시설, 구로회관, 극장, 공원, 도서관, 종합병원 등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각종 전시회, 예술제 행사 등도 행하고 있어 이제다른 구와 같이 구민들의 문화생활에 관심이 증폭되고 있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구로구에도 유진오씨 별장, 원각사와 관음사, 정선옹주묘와궁골, 수문장 느티나무, 고척공구상가 그리고 교통안전진흥공단 같은명소도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적인 안식처 구실을 하고있다.
그리고 구로구에는 일찍이 전의(全義) 이씨, 안동(安東) 권씨, 청주(淸州) 한씨 등이 세전(世傳)하면서 전통적 씨족문화를 이어온 예도 발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