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탐방

구로동별역사

신도림동

연혁 및 동명의 유래

신도림동은 조선시대말 까지는 경기도시흥군 상북면(上北面)의 도야미리(道也味里) · 원지목리(遠芝牧里) 등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해 경기도 내 각면의 명칭과 구역을 다시정함에 따라, 이 지역은 경기도 시흥군 북면 도림리(道林里)가 되었다.이어 1936년 4월 1일에 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의해 경기도 시흥군의영등포읍과 북면 · 동면 지역의 일부가 경성부에 편입될 때 도림리 중상도천(上道川) 우안(右岸) 지역만 경성부에 편입되어 도림정(道林町)이되고 상도천 좌안(左岸) 지역은 이에서 제외되어 경기도 시흥군 동면도림리로 편제되었다. 광복 후 1949년 8월 13일에 대통령령 제159호에따라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이 확장될 때 이 도림리는 영등포구에편입되었는데 1936년에 먼저 편입된 도림리가 있는 까닭에 신도림리라하였다.

그러나 동리명은 옛날 그대로 "리(里)"로 칭해오다가 1950년3월 15일서울특별시조례 제10호 「서울특별시 동리 명칭 중 개정의건」이 공포되어 모두 "동(洞)"으로 고쳐져 신도림동이 되었다. 1975년10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 979호로 동명칭 및 구역을 확정하고, 동981호에 의해 동장 정원 및 명칭과 관할 구역을 변경하였는데, 이 때신도림동은 신도림1동과 2동으로 분동되었다. 그리고 1977년 9월 1일서울특별시조례 제1181호에 의하여 인구 3만명 이상의 동을 분동함에다라 신도림 2동은 대림1동과 2동으로동명이 바뀌면서 분동되었다. 대림동(大林洞)이란 명칭은 신대방동(新大方洞)의 대(大)자와신도림동(新道林洞)의 림(林)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따라서신도림1동은 원래의 이름대로 신도림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후1980년 4월 1일 대통령령 제9630호에 의해 영등포구로부터 구로구가분리 신설됨에 따라 구로구에 속하게 되어 오늘에 이른다. 그러므로조선시대의 도림리(道林里)는 구로구의 신도림동과 영등포구의 도림동,대림동으로 3분되어 그중 신도림동만이 구로구에 속하게 되었고 나머지지역은 영등포구에 속하게 된 것이다.

신도림동이란 동명은 도림동에서 새로 갈라져 나왔으므로 불리어진이름이다. 도림동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가 전해 오고 있다.하나는 이 마을 일대의 들판이 억새풀 종류의 새나무가 많았으며, 특히길옆에 삿자리 종류의 풀이 숲을 이룬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라는것이다. 또 하나는 산의 형국이 마을 뒤로 산처럼 둘러 싸고 있어 이마을이 국도에서 돌아앉아 있다고 해서 붙어진 이름인 "도야미리(道也味里)"가 도림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신도림동은 60년전만 하더라도 6가구만이 거주했던 한촌이었다.그런데 1934년 무렵 경인도로가 개통되면서 전일의 도림동 지역이었던문래동(文來洞) 철거 지역 주민 30여 가구의 이전으로 주민 수가늘어났으나 이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광복 이전만 하여도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50여 세대만이 거주하였다. 일제 때 경인로도로변의 동아건설 산업주식회사 장비사업소(지금의 신도림동 432번지)자리에 류정(柳町) 염색공장이 세워지면서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하자 신도림동 이름 대신에 류정(柳町) 마을로 더 잘 알려졌다. 류정마을하면인근에서는 인심이 좋은 마을로 알려지는 한편 이곳의 참외는 특히유명했다.

위치 및 연혁

구로구의 동북쪽에 위치한 신도림동은영등포와 양천구의 접경이자 경인로, 서부간선도로 및 지하철 신도림역, 도림천역이 위치하여 교통 인구가 많고, 안양천과 도림천이 합류하는저지대는 준공업지구로 많은 공장이 밀집되어 있다. 1960년대부터공장지대가 형성되기 시작하여 이제는 등록된 공장업체 333개(1993년)에달하는 공업지구가 되었다. 유명한 것으로 도림교 건너 경인로 우측에넓게 자리잡고 있는 신도림동 365번지의 한국타이어, 그 옆의삼영화학공업(三營化學工業), 한국타이어 남쪽에 있는대성연탄(大成煙炭), 신도림동의 남동쪽 경인로변의종근당제약회사(鐘根堂製藥會社)등이 유명하다. 그 동안은 공장이산재한 까닭에 환경공해와 관련된 민원이 많았던 지역이나, 근래에는공장지대가 다른 곳으로 이주해가는 추세이고 건축경기의 활성화에힘입어 종근당의 부지에 아파트 건립이 추진되고 있는 등 점차 쾌적한주거지로 발전되고 있다.

구로구의 동북쪽에 위치한 신도림동은 영등포와 양천구의 접경이자경인로, 서부간선도로 및 지하철 신도림역, 도림천역이 위치하여 교통인구가 많고, 안양천과 도림천이 합류하는 저지대는 준공업지구로 많은공장이 밀집되어 있다. 1960년대부터 공장지대가 형성되기 시작하여이제는 등록된 공장업체 333개(1993년)에 달하는 공업지구가 되었다. 유명한 것으로 도림교 건너 경인로 우측에 넓게 자리잡고 있는 신도림동365번지의 한국타이어, 그 옆의 삼영화학공업(三營化學工業), 한국타이어 남쪽에 있는 대성연탄(大成煙炭), 신도림동의 남동쪽경인로변의 종근당제약회사(鐘根堂製藥會社)등이 유명하다. 그 동안은공장이 산재한 까닭에 환경공해와 관련된 민원이 많았던 지역이나,근래에는 공장지대가 다른 곳으로 이주해가는 추세이고 건축경기의활성화에 힘입어 종근당의 부지에 아파트 건립이 추진되고 있는 등 점차쾌적한 주거지로 발전되고 있다.

옛지명

원지목리

원지목리는 옛날 도림천 근처에서 소와 말을길렀기 때문에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이에 따라 도림천을마장천(馬場川)이라고도 부른다. 옛날 마장천 근처에 풀이 많아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말을 기르던 양마장(養馬場)이 있었던 데서 그명칭이 유래한다. 조선초기부터 말은 그 수요가 많았던 까닭에 서울동쪽 살곶이벌(箭串坪)에 말을 기르는 목장을 설치하였지만,그것만으로는 수요를 충당할 수가 없어서 전국적으로 많은 마장(馬場)을설치함에 따라 이곳에도 마장이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교통수단의 발달로 말의 용도가 거의 없어졌지만, 100여년 전만하더라도 말은 가장 유용한 교통수단이었을 뿐 아니라 역마(驛馬)나파발(擺撥)을 위시하여 농경에도 이용되었다. 또 전시(戰時)에도전마(戰馬)로서의 역할을 담당했을 뿐 아니라, 말갈기와 말총은 갓이나관모(冠帽)를 만드는 중요한 재료로 쓰였으며, 말 가죽은 고급 가죽으로신발 등을 만드는데 사용되었고, 심지어 마분(馬奮)은비료 · 종이 · 연료 · 약의 원료로도 사용되었다.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마분지(馬奮紙)는 원래는 마분(馬奮)을 원료로 만든 종이었던 것이다.이처럼 말의 각 부위는 다방면으로 사용되었던 까닭에 항상 수요가많았는데,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는 중국에서 말의 진상을 요구해와이만저만한 고통이 아니었다. 고려 공민왕 23년(1374)부터 조선 세종9년(1427)까지 53년 동안 1만여 필의 말이 중국에 보내졌고, 조선초에는 한 번에 1만여 필의 말을 바친 적도 있었다.

또 근래에는 말고기를 잘 먹지 않지만 조선 초에는 말고기를고급식품으로 즐기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세종 때에는 말의 값이폭등하여 "말고기 파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에 한성부에서는 말의도살과 말고기의 판매를 허가제로 통제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처벌하기도 하였으며, 세종 3년(1421)에는 외국의 사신 접대에도말고기의 사용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조처에도 불구하고 양반들 사이에는 밀도살한 말고기를 몰래 먹기도하였다. 이와 함께 말의 값이 오르자 관아(官衙)나 개인이 기르는 말의갈기와 말총을 몰래 잘라가는 범죄도 빈번히 발생하여 사회문제가되기도 하는 실정이었다. 성종(成宗) 때에는 말가죽으로 만든 가죽신의착용을 제한하기도하였다.

상원지목

원지목리의 한 마을로 위쪽에 있던마을이다.

송원지목리

원지목리의 한 마을로 아래쪽에 있던마을인데 송씨(宋氏)가 처음 입주하였던 까닭에송원지목리(宋遠芝牧里)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아랫말

상원지목(上遠芝牧)의 아래쪽에 있던마을인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웃마을

상원지목(上遠芝牧)의 위쪽에 있던마을인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벌동네

지금의 조흥화학(朝興化學)이 위치한 부근의벌판에 있던 마을로, 벌판에 있던 동네라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붙었다.

모랫말다리

도림천에 있는 도림교(道林橋)의 옛이름이다. 도림천은 지금은 대부분 복개 되어 도로로 이용되고있다.

구로동

연혁 및 동명의 유래

구로구의 중심동인 구로동은 현재 구로본동과 구로1동∼5동의 6개의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명과 관련 옛날이곳에는 9명의 장수한 노인이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조선 영조(英祖) 시대까지는 경기도 금천현(衿川縣) 상북면(上北面)구로(九老)1 · 2리였으나, 1795년(正祖 19년) 衿川縣(금천현)이시흥현(始興顯)으로 개칭됨에 따라 시흥군(始興郡) 상북면(上北面)구로리(九老里)가 되었다. 1895년(高宗 33년) 5월 26일 전문 6조의 칙령98호를 발표하여 지방제도의 대개혁이 단행되었는데, 이 때 시흥현은시흥군으로 바뀌고 안산 · 과천군과 함께 인천부(仁川府)에 속하게되었다. 이후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朝鮮總督府令) 제111호에의해 경기도 각 면의 명칭과 구역을 새로 정함에 따라, 이 지역은경기도 시흥군 북면(北面) 구로리가 되었다. 이어 1936년 4월 1일에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의거해 경기도 시흥군의 영등포읍과 북면 · 동면지역의 일부가 경성부에 편입될 때 구로리 지역은 이에서 제외되어경기도 시흥군 동면(東面) 구로리가 되었다.

1949년 8월 13일 대통령령 제159호에 따라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이대폭 확장되어 경기도 시흥군 동면의 구로리 · 도림리 · 번대방리 및경기도 고양군 수인면 · 둑도면 · 은평면의 42개 동리가 서울시에편입되었는데, 이 중 시흥군 동면 구로리 · 도림리 · 번대방리 등 3개동리는 영등포구에서 직접 관할하였다. 그러나 동리명은 옛날 그대로 "리(里)"로 칭해오다가 1950년 3월 15일서울특별시조례 제10호「서울특별시 동리 명칭 중 개정의 건」이 공포되어 모두 "동(洞)"으로고쳐졌다.

1970년 5월 18일 서울특별시조례 제613호 「동장정원 및 명칭과관할구역 변경조례」로 행정동이조정되어 구로동은 구로제1동, 구로제2동, 구로제3동의 3개동으로 분동(分洞)되었다. 1975년 10월 1일서울특별시조례 제 979호에 의해 동명칭 및 구역확정이 있었고,동981조에 의해 동장정원 및 명칭과 관할구역의 변경이 있었는데, 이 때구로4동이 신설되었다. 그리고 1977년 9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제1181호로 인구 3만명 이상의 동을 분동함에 따라 구로 1동을 구로1동과 5동으로 구로4동을 구로4동과 6동으로 각각 분동하였다. 그리고 3년 후인 1980년 4월 1일 대통령령 제9630호에 의해 구로동공업단지를 중심으로 발전 계획이 수립되어 영등포구로부터 구로구가분리 신설됨에 따라 구로구에 속하게 되었다. 1988년 7월 1일 서울특별시 구로구 조례 제158호로 구로본동이 신설되어 7개의행정동으로 나뉘어 오늘에 이른다.

위치 및 연혁

구로동은 구로구의 중심이 되는 동으로 그 위치는 동쪽은 독산동과 영등포구 문래동(文來洞) · 관악구 신림동(新林洞)과 이웃하여 있으며, 서쪽은 고척동과, 남쪽은가리봉동과 광명시(光明市)와 북쪽은 신도림동(新道林洞) 및 영등포구문래동과 이웃하여 있다.

구로동은 6개의 행정동으로 나뉘어 있는데, 전체의 면적은 5.2㎢로 구로구 전체의 약 4분의 1에 달하며, 인구또한 14만여명으로 구로구 전체의 38%에 달한다. 그리고 본동에는구로구 행정의 중심인 구로구청과 구로경찰서가 자리잡고 있으며, 흔히 구로공단으로 불리는 한국수출공업단지 중 제1단지가 구로3동에 자리잡고 있어 구로구 산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또 구로본동에는 구로기계공구상가 단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제5동에는 애경백화점이 들어서 구로구의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또 교통면에서도 경인로와 남부순환로가 지나고 있고, 가마산길, 구로동길, 공단로, 신대방로 등의 가로망이 잘 발달하였을 뿐 아니라, 철도로는경부선과 경인선이 지나고 있으며 지하철 1호선의신도림역 · 구로역 · 구일역과 2호선의 신도림역 · 대림역 · 구로공단역이위치하여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구로동은 구로구를 대표하는 중심동일뿐 아니라, 상업과공업의 중심지로 일찍부터 발달하여 구로구의 다른 지역에 비해도시화가 진전된 까닭에, 원래의 토박이는 별로 없고 대부분이이주민이다. 따라서 구로동의 자연부락 명칭이나 옛 지명은 원주민의이전과 공단을 중심으로 한 급격한 신도시의 형성으로 지금은 별로 남아있지 않으며, 지금은 공단 위주의 공업지역을 벗어나점차 쾌적한 주거지역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추세이다.

옛지명

구루지 마을

하구로리(下九老里)의 옛 명칭으로 구로동가운데 가장 오래된 마을이다. 원래 구로리는 상 · 중 · 하의 3개의마을로 형성되었으며 그 중 가장 지대가 낮은 곳에 위치한 마을이구루지 마을이다. 지금의 구로5동사무소 동남쪽 일대가 구루지 마을이고그 중심지는 애경백화점 뒤편 부근이라고 한다.

늑대다리

각만이 마을은 현재 구로 5동 사무소 서쪽애경백화점 오른쪽에 있던 마을로 풍수가들이 앞으로 이 지역에 수만호가 들어앉을 것이라고 예언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예언대로이곳에는 많은 건물이 들어서고 인구밀도도 높을 뿐 아니라 통행인도많은 곳이 되었으니, 풍수가들의 예언이 들어맞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마을의 뒷동산을 각만이 동산이라고 불렀는데 옛날에는 숲이 많았다고한다.

각만이마을

원지목리의 한 마을로 아래쪽에 있던마을인데 송씨(宋氏)가 처음 입주하였던 까닭에송원지목리(宋遠芝牧里)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새말

지금 구로5동의 동쪽 산기슭에 새로 생긴마을로 처음에는 윤씨 농막과 서너 채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

주막거리

늑대다리 부근의 경인가도 변에 주막과대장간을 포함한 서너채의 집이 있어 주막거리라고 불리었다. 현재의경인로 앞 기아산업 중기사업소 일대에 해당된다. 이 주막거리에서 멀지않은 곳에 경부(京釜) · 경인선(京仁線)의 분기점이 되는 구로역이있으니, 옛날의 주막이 오늘날의 역사(驛舍)가 된 우연치 않은 예라하겠다.

옻우물 약수터

구로5동 523번지 29호에 있던 상나무재에서늑대다리로 가자면 오른쪽은 산이고 왼쪽은 논인데, 그 가운데로 길이나 있다. 그 길로 늑대다리를 거의 다가서 산밑에 샘물이 있는데, 겨울에도 얼지 않고 흘렀다. 이 물이 약수물로 효험이 있다는 소문이퍼지자 인근 마을 사람은 물론 먼 곳에서도 약물을 퍼다 먹었으며, 매월초하루와 보름이면 이 약수물에 고사를 지내는 사람이 많았다. 이약수물은 특히 옻오른 사람이 마시면 백발백중으로 나았기 때문에옻우물약수터라고 하였던 것이다.

명물 및 명소

상나무재

구로5동 523-29에 있던 큰 상나무(향나무로추정)로 말미암아 상나무재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상나무는 구로구의유래가 된 아홉 노인(老人) 중 한 분이 식재 하였다 하며, 500여 년이지난 나무로 마을을 수호하는 서낭의 역할과 기원, 기우제 등 망신들을위한 제사를 지냈으며, 마을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을 때는 반드시 절을하고 넘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나무는 속 내부가 썩고 도시개발 등으로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지자 20여년전에 제거되어 현재는 그위치에 가옥이 들어서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현재 주민 중30여년 전에 이 상나무 아래에서 가족사진을 찍은 것이 2장 남아 있어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구로공단

구로동 하면 먼저 공장지대를 연상하게되는데, 이른바 구로공단으로 불리는 한국수출 공업단지 중 대부분이금천구로 이관되었으나, 이 중 제1단지는 아직도 구로동에 자리잡고있다. 이 지역이 공단으로 육성된 이유는 이 지역이 경부선과 경인선이지나고 있으며 수도권 전철과 경인고속도로에서 모두 1km 이내에자리잡고 있어, 원부자재의 반입 및 수출화물의 선적 등은 물론이고,종업원의 출퇴근에 이르기까지 입지조건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1963년입지가 결정된 뒤 1965년에 착공하여 1967년에 준공된 제1단지의총면적은 모두 45만여㎡로 지금의 구로3동에 자리잡고 있다. 이공단에는식료품 · 섬유 · 목재 · 인쇄 · 석유화학 · 비금속 · 1차금속 · 조립금속 등의업종이 입주하고 있으며, 종업원 수는 1987년 경에는 15,000 명에육박하였으나 현재는 점차 줄어들어 11,000명 정도이며 지금도 공장들이외지로 이전하고 있는 추세이다.

구로기계부품유통단지

구로동 635-8번지 일대의 공장 이적지 3만여평에 건축면적 5만여평의 대규모 구로기계부품유통단지가 들어서서영등포의 기계공구상가와 함께 주요 상가를 형성하고 있다. 서울시내청계천 등지의 부품상가들을 주로 입주시킬 계획으로 조성된 본 단지는도심인구의 교통집중을 억제하고 도심부의 적정시설을 외곽으로이전하는데 기여하고 있으며, 구로구의 새로운 상권으로 육성되고있다.

애경백화점

지금으로서는 구로구에서 가장 유명한 곳중의 하나가 된 애경백화점은 1993년 8월 30일 허가를 받아 1994년 9월4일 영업을 개시하였다. 지하 5층 · 지상 8층 규모의 애경백화점은연면적 약94,000여㎡에 매장면적이 약 22,388㎡에 달하며 모두 453개의점포가 자리잡고 있다. 특히 구로전철역과 인접하고 있어서 교통이편리한 까닭에 구로구의 중심 상권으로 발전하고 있는데, 백화점 내에는매장 뿐 아니라 병원 · 문화센터 등이 함께 자리잡고 있어 이 지역주민들의 생활의 질을 높이는데 기여하고 있다.

가리봉동

연혁 및 동명의 유래

가리봉동은 조선말까지는 경기도 시흥군동면(東面) 가리산리(加里山里)였다가 가리봉리(加里峰里)로 바뀌었다. 가리산리에서 가리봉리로 명칭이 바뀐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12년에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시흥군동면 가리봉리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이미 가리봉리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될 때까지 큰 변동이 없었으며,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편입되면서 가리봉동(加里峰洞)의 가(加)와 독산동(禿山洞)의산(山)자를 따서 가산동(加山洞)이라 명명하였다. 당시 새로 편입된 지역은 면적이 광활하였기 때문에 서울시에서는 서울특별시조례제276호로 이들 지역은 관할하는 10개의 출장소를 신설하였는데 가산동은 영등포구의 관악출장소가 관할하였다. 그러나 1969년 1월 1일서울특별시조례 제491호로 10개 출장소 중망우 · 오류 · 양동 · 관악출장소가 폐지됨에 따라 가산동은 영등포구의 직할동이 되었다.

1975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7816호에 의하여 다시 가리봉동과 독산동으로 분동되었는데, 당시 가리봉동의 면적은 3.36㎢였으며3,673가구에 인구는 33,045명이었다. 1977년 9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제1185호로 인구 2만 5천명 이상의 동을 분동하였는데, 이 때 가리봉동은 가리봉1동과 2동으로 분동되었다. 이후 1980년 4월 1일대통령령 제9630호에 의해 영등포구로부터 구로구가 분리 신설됨에 따라구로구에 속하게 되었으며, 1980년 7월 1일서울특별시조례1413호「동사무소 설치조례」에 의해 가리봉1동이 가리봉1동과 가리봉3동으로 분동되었다.

1995년 3월 1일 금천구가 신설되어 구로구에서 분구(分區)됨으로인해 가리봉동의 일부와 독산동, 시흥동은 금천구가 되었다. 이 때금천구와 구로구는 남부순환도로를 경계로 하였는데, 그 결과가리봉1동의 일부와 가리봉 2동의 대부분 그리고 3동의 전부가 금천구로 편입되었다. 가리봉1동의 면적은 0.29㎢에서 0.255㎢로 0.035㎢가줄어든데 그쳤으나, 가리봉2동은 2.03㎢에서 0.147㎢로 면적이 10분의 1이하로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남부순환도로 남쪽의 공단지역이 모두금천구로 편입되어 면적으로나 인구로나 구로구 내에서 가장 영세한 동이 되고 말았다.

가리봉동의 동명의 유래는 두 가지로 생각되고 있는데, 그 하나는 이지역 주위의 작은 봉우리가 이어져 마을이 되었다고 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 연원을 고을과 같은 의미를 갖는 "갈" 혹은 "가리"에서 찾고 있다. "가리"는 갈라졌다는 뜻에서 유래하는데, 구로구의 전체적인 땅 모양이 바지 가랭이처럼 갈라져 있는 것과 연관된 명칭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위치 및 연혁

가리봉동의 북쪽과 동쪽은 구로동과 접하고있고, 서쪽 · 남쪽은 남부순환도로를 경계로 금천구 가산동과 마주보고있다. 가리봉동의 공단오거리 주변은 공단근로자를 상대로한 다양한 상가가 형성되어 상업의 중심지로 번창하고 있으나 최근에는 유흥업소가 점차 늘어나면서 사회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하고 있다.

옛지명

큰노배미

하구로리(下九老里)의 옛 명칭으로 구로동가운데 가장 오래된 마을이다. 원래 구로리는 상 · 중 · 하의 3개의 마을로 형성되었으며 그 중 가장 지대가 낮은 곳에 위치한 마을이 구루지 마을이다. 지금의 구로5동주민센터가 동남쪽 일대가 구루지 마을이고그 중심지는 애경백화점 뒤편 부근이라고 한다.

모아래

현재의 가리봉동 89번지 일대를 가르키는말이다. 이 대촌은 가리봉 2里에 있었던 마을로 가리봉동 중에서 가장오래되었고 큰 마을이다. 촌은 우리말로 "배미"라고 풀이된다. 따라서 대촌은 큰논배미 또는 한논배미라는 의미로, 농경이중심이 되었던 전통 사회에서는 큰논배미를 중심으로 인구가 집중되고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당시 밤나무골 · 사당골 · 석바탱이 등도대촌의 한 마을이었으며, 과거에 대촌을 중심으로 마을을 형성한 지역이 지금도 상가와 주거밀집지역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연원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각만이마을

각만이 마을은 현재 구로 5동 사무소 서쪽애경백화점 오른쪽에 있던 마을로 풍수가들이 앞으로 이 지역에 수만호가 들어앉을 것이라고 예언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예언대로이곳에는 많은 건물이 들어서고 인구밀도도 높을 뿐 아니라 통행인도많은 곳이 되었으니, 풍수가들의 예언이 들어맞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마을의 뒷동산을 각만이 동산이라고 불렀는데 옛날에는 숲이 많았다고한다.

새말

모아래는 가리봉 1동에 있던 마을로 40여세대가 모여 살면서부터 유래된다. 모아래가 있던 곳은 원래 청룡(靑龍)한 마리가 잠을 자고 있던 청룡혈(靑龍穴)의 산이었으나 갈증이 난 용이물을 먹기 위해 사방을 둘러보던 중 자기가 잠을 자던 산 아랫쪽 땅속으로 물이 흐르고 있음을 알고 못을 파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저수지가 생겨났고 이 저수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그 아래에 모여살았기 때문에 못아래 마을이다.

명물 및 명소

향나무

모아래는 가리봉동에 있던 마을로 40여세대가 모여 살면서부터 유래된다. 모아래가 있던 곳은 원래 청룡(靑龍)한 마리가 잠을 자고 있던 청룡혈(靑龍穴)의 산이었으나 갈증이 난 용이물을 먹기 위해 사방을 둘러보던 중 자기가 잠을 자던 산 아랫쪽땅속으로 물이 흐르고 있음을 알고 못을 파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저수지가 생겨났고 이 저수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그 아래에 모여살았기 때문에 못아래 마을이라 하였다가 후에 음이 변하여 모아래가 된것이다.

고척동

연혁 및 동명의 유래

고척동(高尺洞)은 조선 영조 때 부평도호부고좌리였다가 1895년 5월 26일 인천부 부평군 수탄면 고척리로바뀌었고, 1896년 8월 4일 경기도 부평군 수탄면 고척리가 되었으며,1914년 3월 1일 경기도 부평군 계남면 고척리가 되었다가, 1941년10월에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고척리가 되었다. 1962년 11월 21일국가재건최고회의가 제정 공포한 법률 제1172호「서울특별시 · 도 · 군 · 구의 행전구역변경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1963년 1월 1일을 기해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이 대폭 확장되어시흥군 · 김포군 · 부천군의 많은 지역이 영등포구로 편입되었다.

이 때소사읍의 7개리(고척 · 개봉 · 오류 · 천왕 · 궁 · 항 · 온수)와 오정면의2개리(오곡 · 오쇠)가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는데, 이 때 고척리도부천군 소사읍의 다른 6개 리와 함께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서울특별시는 이들 편입지구를 관할하기 위하여 1963년 1월 새로 10개의출장소를 설치하였는데, 그 중 오류출장소는오류리 · 고척리 · 개봉리 · 궁리 · 온수리 · 천왕리 · 항리 등을 관할하였다.1968년 1월 1일 오류출장소의 폐지로 영등포구의 직할동이 되었다가,1980년 4월 1일 대통령령 제9630호에 의해 영등포구 관할구역?? · 개봉동 · 오류동 · 궁동 · 온수동 · 천왕동 · 항동일원과 신도림동 일부를 관할구역으로 구로구가 분리 신설되고 구간경계 조정이 있게 되었다. 이 때 고척동은 구로구에 속하여 현재에이른다.

이후 인구의 증가로 인하여 각 동 사이에 인구 및 관할구역 등이현저한 차이를 나타내게 되자 1970년 5월 18일 서울특별시조례 제613호「동장정원 및 명칭과 관할구역 변경조례」에 의해 동의 관할 구역을조정하여 행정동의 균형 및 능률을 제고하였다. 이 대에 확정된고척동의 동세는 면적 3.77㎢에 가구수 3,775호 인구 18,184명으로 16통153개 반으로 조직되었다. 1978년 10월 10일 서울특별시조례 제1286호에의해 동명칭 및 행정구역획정이 있게 되고, 1287호에의한 동 통합 및분동으로 서울특별시는 종래 369개동에서 14개동이 증가하고 1개동이폐동됨으로써 382개동이 되었다.

이 때에 분동대상은 인구 3만5천명이상인 동과, 그 미만의 동 가운데 아파트의 입주 등으로 인구 격증이확실한 곳이었다. 고척동은 이 때 고척1동과 고척2동으로 분동되었는데,그 조정을 살펴보면 고척1동은 인구 18,110명이었고 고척2동은18,561명으로 그 경계는 자연하천과 소방도로를 기준으로 하였다.

고척동의 동명의 유래는 두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 이동네의 한 자연 마을인 고좌리(高坐里) 즉 높은 곳에 생긴 마을이라는데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이 동네는 경기도부천 · 안양 · 강화 사람들이 서울지역 사람들과 안양천을 경계로 하여생필품 및 농산물을 교환하여 오던 곳으로서 당시 계량기가 없어 교환측정이 곤란하자 긴 자(高尺)로 재서 서로 교환 측정하던 것을 고척이라칭한 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위치 및 연혁

고척동의 위치는 동쪽으로 안양천을 끼고구로동과 경계하며, 북쪽과 서쪽으로는 양천구(陽川區) 신정동과인접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개봉동과 경계하고 있으며 근래 새로아파트가 들어서고 있어 신흥 주택단지로 바뀌어가고 있다.

옛지명

고좌리 고잘마을

고척동의 동명이 되었다는 고좌리 또는 고잘마을은 높은 곳에 생긴 마을이라 하여 불리워졌다. 고잘은 고척동의옛마을 이름으로서 현재 고척1동 고척초등학교와 신안아파트 아랫쪽일대를 일컬었는데 고척동 전체지형 가운데 지대가 가장 높다.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안양천 변의 방죽을 고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잘마을 앞의 길은 개봉4거리에서 강서로와 연결되며, 1980년대 초에이곳 주민들이 야금회사라고 불렀던 한국합금철회사와 우일화학 등의군소공장이 이전하고 풍원연립, 한효아파트, 현대아파트, 우성아파트, 서울가든 아파트 등이 들어서 대단위 주거지역이 형성되고 있다.

장터골

구로동 독립산업에서 안양천 고척교를 건너고척동의 첫 번째 동네가 장터골이다. 옛날에는 장터골 앞 안양천변에서경기 강화 · 시흥 · 안양 지역사람들과 서울지역 사람들이 안양천 옆에서생필품 및 농산물을 교환하여 오던 곳이라 하여 장터골이라 불리어진듯한데, 현재 동양공전 및 동양공고의 아랫마을로서 1975년 서울시에서첫번째 시도한 재개발사업지역으로 판자집과 구옥들은 말끔히 사라지고잘 정배된 주택지로 형성되었다.

덩어리

덩어리는 현재 고척2동사무소와덕의초등학교 주변에 위치한 마을로 고척동 가운데 역사가 가장 깊다. 조선시대에 유일하게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던 덕의리는 30년 전까지만해도 가옥이 20여호 있었는데 아직도 이곳 사람들은 덩어리로 부르고있다.

삼공구

현재 덕의초등학교 앞 고척2동168번지일대에는일제 때 일본인 고바야시(小林)의 공장에 근무하는직원들을 위해 지은 삼공구주택(三工區住宅)이 있었다. 고바야시는지금의 영등포교도소와 구치소 자리에 군수공장을 짓고 이곳에 주택을지었다고 한다. 고바야시는 고척동의 토지를 거의 다 빼앗고 오갈데없어진 이곳 사람들이 그의 공장에서 일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고주민들은 말한다. 부근에 삼공구 다방이 있어 옛날의 이름을 전하고있다.

능골

능골마을은 고려시대에 이곳에 능터를잡으려고 했던 까닭에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고척 2동 233번지 일대의계곡이며 전에는 능골로 넘어가는 고개에 서낭당이 있었다고 한다. 능골에는 1984년 12월 17일 고척고등학교가 설립되어 구로구 안양천서쪽의 개봉 · 고척 · 오류 지역에서 유일한 인문계 고등학교로 자리잡고있으며 인근에 한성아파트 등 많은 밀집주택이 들어서서 옛날의 계단식논으로 형성되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부근에고척근린공원과 신정근린공원 등이 있어 주민들의 산책로로 이용되고있다.

가는골

가는골 또는 세곡은 좁고 가는 골짜기에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가는골의 우측은고척근린공원이고 좌측은 1972년 11월 1일에 설립된 세곡초등학교로 그아랫마을이 가는골이다. 가는골은 1970년초에 조성된 주택단지가 들어선이후 옛날의 포도밭이었던 곳이 지금은 인구밀집지역으로 바뀌고 있다. 강서로와 남부순환로를 연결하는 고척동길을 사이에 둔 이 마을은옛날의 농로나 우마차길을 경계로 개봉1동과 동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이 마을의 주거지역조성과 함께 들어선 개봉시장을 중심으로 상권이형성되어 고척2동 일부와 개봉1동의 생활권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또한이 마을 뒷산 높은 지대는 1970년도에 택지를 조성하여 마을을이루었는데 이 마을을 육본단지 또는 삼덕마을이라고 부르고 있다.

삼거리

안양천 고척교를 지나 동양공전을 우측으로끼고 고척1동 안동네로 들어가면 로사의원이 마주하는데 그곳에서좌우로 길이 갈라지게 되어 삼거리라고 부른다. 강서로가 개통되기전까지는 이 부근은 많은 주민이 왕래하는 생활의 중심지였고, 능골 · 덩어리의 주민들이 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이 길을 걸어동양공전 앞까지 걸어와야 했던 곳이기도 하다.

단혈고개

능골에서 고척동 육본단지를 통하여개봉동으로 넘어가는 길에 있는 고개를 흙이 묽은 관계로단혈(丹血)고개라 했는데 전에는 서낭당이 있기도 하였다.

명물 및 명소

우렁바위와 도당제

고척동에는 옛날에 바위가 울었다 하여우렁바위 또는 명암(鳴岩)이라고도 하고 길마바위라고도 하는 바위가있다. 양천구 목동과의 경계 지점에 있는 이 바위의 모습이 마치 감투나사모처럼 생겨 감투바위, 사모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옆에는말안장 처럼 생겨 안장바위 또는 의자 바위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다. 바위는 그리 크지 않으나 높은 산이 없는 이 지역에서는 그 중 큰바위에 속하는 것이다. 지금은 이 바위들을 목동아파트 단지 물탱크가있는 곳으로 옮겨놓았으나, 1988년까지만하더라도매년 10월 초하루에는이 바위에서 동네의 번영과 평안을 축원하는 도당제(都堂祭)를 지냈다고한다. 부근에 약수터가 있어 주민들의 산책로로 이용되고 있다.

고척공구상가

영등포교도소와 영등포구치소가 인접한고척동 103-4번지에는 청계천 주변에 밀집해 있던 기계공구상가를외곽지역에 분산한다는 시책 아래 기계공구상가들이 이전해 왔다. 고척공구상가라 명명된 이곳은 건물 3동으로 이루어져 각종산업용품들의 도소매가 이루어지고 있다. 전기 · 전자용품 등의 부속품과각종기계용품을 판매하는 이곳에서는 1990년초부터는 우리나라에서는처음으로 시장 상가 건물의 옥상을 주차장으로 개방함으로써 주차난해소에도 한몫을 하고 있으며, 공구상가가 들어서면서부터 번화해진고척동은 경인로와 경인전철이 지나가고 있어 한적했던 이곳이 이전과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번잡해졌다. 이로 인해 공구상가의 주변에는많은 아파트가 들어서서 동의 면모를 일신시키고 있다.

동양공업전문대학

구로구의 유일한 대학인동양공업전문대학(東洋工業專門大學)은 고척교를 건너 안양천변의고척동 62번지 160에 자리잡고 있다. 1939년 4월 1일 동양공과학원으로설립되어 공업기술인 양성을 시작하였다가, 1965년 동양공과전문학교로바뀌면서 보다 전문적인 공업인을 육성하다가 1974년 2월에동양공업전문학교로 개편하여 대학교육을 시작하였다. 1980년에공업전문대학으로 승격된 이 학교는 효성그룹이 재단으로 되어 있으며졸업생들은 특히 전자 · 전기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1953년 5월 19일에 설립한 동양공업고등학교가 노량진에서 이전하여같은 캠퍼스 내에 있다.

함양여씨묘역

구로구 고척동 산6번지 3호에 소재하는함양여씨묘역은 구로구에 유일한 서울특별시 지정 유형문화재로제80호이다. 1991년 12월 24일 지정된 이 묘역의 넓이는 1,025㎡이며,묘역 내에 묘 2기와 묘비 1개 · 문무관석 4개가 있다. 이 문화재는조선초기의 묘제를 알 수 있는 분묘로 함양여씨 종친회가 관리하고있다.

개봉동

연혁 및 동명의 유래

개봉동의 동명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조선영조 때에는 부평도호부 갈탄(葛灘)이었다가 1895년에는 인천부 소속이되었으며, 1896년에 다시 경기도 부평군 수탄면 갈탄으로 바뀌었고,1914년 3월 1일에 경기도 부평군 계남면 개봉리가 되었다. 1941년10월에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개봉리가 되었으며, 1963년 1월 1일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영등포구 오류출장소 개봉동으로 동이란명칭을 갖게 되었다. 1968년 1월 1일 오류출장소의 폐지로 영등포구의직할동이 되었으며, 이어 구획정리사업으로 인한 제방(堤防)의 변동에따라 1973년 7월 1일 법률 제2596호에 의해 경기도 시흥군 서면 광명리일부를 영등포구 개봉동에 편입하였고 개봉동의 일부를 시흥군에편입하여 면적상 0.28㎢의 증가를 가져왔다.

그리고 1977년 9ㅣ월 1일에 대통령령 제8666호에 의해 영등포구에서강서구가 분구 되어 행정동의 조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에서울특별시조례 제1181호(1977년 8월 29일 공포)에 의하여 인구 3만명이상의 동을 분동(分洞)하였는데 이때 개봉동이 개봉 1동과 2동으로나누어졌다. 분동 내역을 보면 경인선철도를 기준으로 나뉜 개봉 1동의인구는 18,739명이었고 개봉 2동의 인구는 16,534명으로 합계35,273명이었다. 이어 1980년 4월 1일 구로구의 신설로 개봉동은구로구에 속하게 되었으며, 동년 7월1일 서울특별시조례 제1413호「동사무소설치조례」에 의하여 상주인구 3만명 이상 또는 1년 이내에3만명 이상으로 급증이 예상되는 동을 분동할 때에 개봉 2동은개봉2동과 3동으로 나뉘어졌다. 이 때 나뉘어진 개봉 2동의 면적은1.55㎢에 인구 20,291명이었고, 개봉 3동은 면적 0.78㎢에 인구는12,974명이었다.

그 이후 개봉 1동은 거성푸르뫼APT, 건영APT, 라인APT 등이 들어서면서 집단거주 지역으로 급격한 인구증가를 가져와서 고척동 길과남부순환로를 경계로 개봉1동의 동남쪽을 개봉 본동으로 1994년 11월1일부터 분동하게 되었다. 1994년 11월 1일 분동 당시의 동세를 보면개봉 1동이 0.63㎢에 인구수 21,741명이고 개봉 본동은 0.71㎢의 면적에인구는 16,334명으로 개봉 1동이 26개 통 189개 반이었고, 개봉 본동은21개통 152개 반이었다.

개봉동의 명칭은 현재 경인선과 남부순환로가 교차하는 남쪽에 있는개웅산의 "개"자와 양천구 신정동과 경계를 이루는 매봉산의 "봉"자를합하여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개봉동은 1969년대부터1970년대에 걸쳐 대한주택공사에서 개봉천 북쪽 저지대에 택지를 조성하여 분양했으므로 신시가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에 따라급격한 인구의 증가가 있었고 자연히 4개의 행정동으로 분동하게 되었던것이다.

위치 및 연혁

개봉동의 위치는 서쪽은 양천구 신정동과인접하고 남으로는 오류동 · 천왕동과 접하며, 동으로는 개봉천을 사이에두고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과 경계하고 북으로는 고척동과 마주한다. 동의 중앙에 동서로 경인로와 남부순환로가 지나고 그 교차 지점에 오류인터체인지가 자리잡고 있으며, 남북으로 개봉로가 관통하고 있어교통의 요지이다. 이러한 지리적인 입지로 인해 안양천 서쪽의 구로구지역 가운데서 가장 번화한 지역이며, 많은 아파트단지가 들어서일직부터 도시화가 진전된 지역이다.

옛지명

잣절

잣절인 백사리(柏寺里)는 옛날에 잣나무가많았고 또 절이 있었다고 하여 불려진 마을 이름인데, 오류초등학교뒷산 너머 남부순환도로 변에 있으며 이 마을은 광산(光山)김씨(金氏)의 집성촌(集姓村)이었으며 마을 뒷산에는 잣절 약수터와배드민턴장을 비롯한 각종 체육시설이 마련되어 있어 이곳 주민들의휴식처로 제공되고 있다. 또한 이 마을에서 거성푸르뫼APT 산등성이를넘어 오류초등학교로 가는 고개를 옛날에는 잣절고개라 불렀다. 이마을은 1970년대 주택단지가 조성되면서 인구증가를 가져왔으며, 단지이름이 양송이단지이므로 이곳 주민들은 양송이주택 또는 양송이마을로불려지고 있다.

덕고개

경인로 덕산병원 부근을 옛날에는 덕고개라불렀는데, 이 고개는 경인로 확장과 남부 순환로의 개설로 인해 이 두도로가 교차하는 오류 인터체인지로 변했다. 개봉 · 고척 지역에서 이고개를 넘어 오류동과 인천으로 가는 유일한 고개로 대보름에는이곳에서 불놀이를 하였다고 하며, 부근의 마을을 덕고개 마을이라부른다.

덩어리

덩어리는 현재 고척2동사무소와덕의초등학교 주변에 위치한 마을로 고척동 가운데 역사가 가장 깊다. 조선시대에 유일하게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던 덕의리는 30년 전까지만해도 가옥이 20여호 있었는데 아직도 이곳 사람들은 덩어리로 부르고있다.

가린열

가린열은 고척동과 경계가 되는 개봉동의중앙에 위치한 곳으로 갈대가 많고 여울이 많은 곳이라 하여 가린여울또는 가린열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칡과 같이 여러 갈래의개천 즉 개봉천 · 오류천 · 개웅천이 안양천과 합수되어 여울이 많다 하여갈탄(葛灘)이라 하였다 한다. 이곳은 갈대가 많고 넓은 습지였던 곳으로수리조합이 있었는데, 지금의 개봉배수펌프장이 있는 곳으로 옛날 물을조절하던 수리조합의 펌프장이었다. 가린열은 아래의 부누꿀과 광주물을포함하는 지역이었다.

부누꿀

부누꿀은 가린열 북쪽마을로 지금의성아단지 아래쪽 개봉노인정과 개봉1동 새마을금고지역으로, 옛날에는이 지역이 구릉지로 자두밭이었는데 매립하여 성아단지를 조성하였다. 뒷산인 가녈봉(일명 갈탄봉)을 부누꿀 뒤쪽에 있는 산이라고 하여부누꿀산이라고도 불렀다.

광주물(광지물)

가린열 여울이 지금의 청실아파트,미주빌라, 개봉역 주변에서는 광주리에 물을 퍼담는 형상과 같이 되므로광주물이라 불렀다고 한다. 혹은 이 지역에 물이 많이 모인 까닭에 넓은연못이란 뜻에서 광지(廣池)라고 한 것이 변하여 광지물 또는 광주물이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와 같이 가린열, 광주물은 여울과 관련이 있는동네로 물과 인연이 깊은 동네이며, 마을의 형성 이후 경인로가 확장개설되어 주택가보다 길이 높았으므로, 안양천의 역수로 여름철이면곧잘 침수를 당하곤 하였다. 이러한 수해를 막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투입하여 개봉빗물펌프장을 확장 신설하여 수방대책에 만전을 기하고있다.

개웅마을

하나님의 교회 신학교 뒷산인 학산은개웅산과 매봉을 잇는 중간에 있는 얕은 능선이라고 볼 수 있는자은산으로 좌우로 경인선 철도와 남부순환로, 경인로가 동서로횡단하는 주요한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산은 6 · 25동란 당시에수도권 지역이 북괴에 점령당하였을 때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의성공으로 인천과 부천을 탈환한 UN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해 올 때 인천과수도서울을 잇는 중요한 병참보급로였으며 기계화부대의 유일한 통로구실를 하였다. 이곳에서 북괴군은 최후 저지선을 구축하고 끝까지저항하였으나 UN군은 이를 어렵게 격멸하고 영등포 노량진을 넘어서울을 장악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 학산을 점령하면서울로 가는데 아무런 장애물이 없고 시야가 한 눈에 들어오는요충지이기 때문이다. 그 이후 이 산은 예비군 전술훈련장으로사용되다가 남부순환로가 개통되면서 따로 떨어진 섬과 같은 작은산으로 남아 있다.

학산(일명 : 두루미산)

능골에서 고척동 육본단지를 통하여개봉동으로 넘어가는 길에 있는 고개를 흙이 묽은 관계로단혈(丹血)고개라 했는데 전에는 서낭당이 있기도 하였다.

명물 및 명소

당나무와 도당제

고척동에는 옛날에 바위가 울었다 하여우렁바위 또는 명암(鳴岩)이라고도 하고 길마바위라고도 하는 바위가있다. 양천구 목동과의 경계 지점에 있는 이 바위의 모습이 마치 감투나사모처럼 생겨 감투바위, 사모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옆에는말안장 처럼 생겨 안장바위 또는 의자 바위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다. 바위는 그리 크지 않으나 높은 산이 없는 이 지역에서는 그 중 큰바위에 속하는 것이다. 지금은 이 바위들을 목동아파트 단지 물탱크가있는 곳으로 옮겨놓았으나, 1988년까지만하더라도매년 10월 초하루에는이 바위에서 동네의 번영과 평안을 축원하는 도당제(都堂祭)를 지냈다고한다. 부근에 약수터가 있어 주민들의 산책로로 이용되고 있다.

하나님의 교회 신학대학교

영등포교도소와 영등포구치소가 인접한고척동 103-4번지에는 청계천 주변에 밀집해 있던 기계공구상가를외곽지역에 분산한다는 시책 아래 기계공구상가들이 이전해 왔다. 고척공구상가라 명명된 이곳은 건물 3동으로 이루어져 각종산업용품들의 도소매가 이루어지고 있다. 전기 · 전자용품 등의 부속품과각종기계용품을 판매하는 이곳에서는 1990년초부터는 우리나라에서는처음으로 시장 상가 건물의 옥상을 주차장으로 개방함으로써 주차난해소에도 한몫을 하고 있으며, 공구상가가 들어서면서부터 번화해진고척동은 경인로와 경인전철이 지나가고 있어 한적했던 이곳이 이전과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번잡해졌다. 이로 인해 공구상가의 주변에는많은 아파트가 들어서서 동의 면모를 일신시키고 있다.

에덴하우스

구로구의 유일한 대학인동양공업전문대학(東洋工業專門大學)은 고척교를 건너 안양천변의고척동 62번지 160에 자리잡고 있다. 1939년 4월 1일 동양공과학원으로설립되어 공업기술인 양성을 시작하였다가, 1965년 동양공과전문학교로바뀌면서 보다 전문적인 공업인을 육성하다가 1974년 시작하였다. 1980년에공업전문대학으로 승격된 이 학교는 효성그룹이 재단으로 되어 있으며졸업생들은 특히 전자 · 전기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1953년 5월 19일에 설립한 동양공업고등학교가 노량진에서 이전하여같은 캠퍼스 내에 있다.

오류동

연혁 및 동명의 유래

오류동은 조선영조 때 부평도호부 오류리로처음 그 이름이 보인다. 1895년 5월 26일에 인천부 부평군 수탄면오류리가 되었다가, 1896년 8월 4일 부평군이 인천부에서 벗어나경기도에 속하게 됨에 따라 자연히 경기도 부평군 수탄면 오류리가되었다. 그 뒤 1914년 3월 1일에 부평군의 관내 행정구역에 면이설치됨에 따라 경기도 부평군 게남면 오류리가 되었다가, 1931년 4월1일에는 경기도 부천군 소사면 오류리로 그 소속이 바뀌었고, 941년10월 1일에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오류리가 되었다.

해방 후인 1963년 1월 1일에 법률 제1172호(1962년 11월 21일 공포)에의한 서울특별시 행정구역확장에 따라 시흥군 · 김포군 · 부천군의 12개면90개리를 서울특별시로 편입하였는데, 이 때 오류동도 소사읍 관내6개동과 함께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어 서울시의 일부가 되었다.이 때 영등포구에는 김포군 양동면 · 양서면, 부천군 오정면 · 소사읍,시흥군 신동면 · 동면 등 3개군에 걸쳐 많은 지역이 편입되었다.

따라서 서울시에서는 이렇게 넓은 신편입지구를 관할하기 위하여 1962년 12월28일자로 공포된 서울특별시 조례 제276호에 의하여 영등포구에신동(新洞) · 관악(冠岳) · 양동(楊東) · 양서(良書) · 오류(梧柳)출장소의5개 출장소를 신설하였다. 오류동은고척동 · 개봉동 · 궁동 · 천왕동 · 항동 · 온수동과 함께 오류출장소관할하에 있었는데, 1968년 1월 1일 서울특별시 조례 제491조에 의하여망우 · 오류 · 양동 관악출장소가 폐지됨에 따라 오류동은 영등포구의직할로 편입되었다. 이어서 1980년 4월 1일 영등포구의 인구 증가로인해 대통령령 제9630호에 의거하여 영등포구의 남부지역을 분할하여구로구를 신설함에 따라 오류동은 구로구에 속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류동의 행정동의 변천은 1963년 1월에 오류동이 서울시에편입되면서 서울특별시 조례 제275조에 의하여 오류동사무소를설치하였다. 그 후 서울시는 1970년 5월 18일 동행정의 불균형을조정하고자 서울특별시조례 제613호 「동장정원 및 명칭과 관할구역변경 조례」에 의해 56개동을 분할하여 113개동으로 만들고, 119개 동을통합하여 65개동으로 줄였는데, 오류동은 동정(洞政) 여건이 어려운수궁동(온수 · 궁 · 항동)을 통합하여 오류동사무소에서 행정을 담당하게되었다. 당시 오류동의 면적은 9.28㎢에 인구는 29,230명, 가구 수는5,823호로 30개 통과 267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어 1975년 10월1일 서울특별시 조례 제981조에 의해 동장 정원 및 명칭과 관할 구역의변경이 있었는데, 이 때 오류동은 경인선 철도를 경계로 오류제1동과오류제2동으로 분동(分洞)되었다. 분동된 오류제1동은 3.66㎢의 면적에3,987가구 18,921명이 속했는데, 관할 구역은 오류동 242번지를기점으로 141, 40, 65, 77∼79번지에 연하는 이북 지역과 궁동 및온수동 일원이었다. 그리고 오류제2동은 5.62㎢의 면적에 2,973가구16,471명이 속하게 되었는데 관할 구역은 천왕동, 항동 일원과 오류동중 오류제1동의 관할 구역을 제외한 부분이었다.

그 후 1980년 4월 1일 영등포구에서 구로구가 분구(分區)됨으로 인해오류동은 구로구에 속하게 되었다. 그 뒤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하여1988년 7월 1일에 오류제1동에서 온수동과 궁동을 분리하여수궁동(온수동 · 궁동)으로 분동하였다.

위치 및 연혁

오류동은 현 위치는동쪽으로는 · 개봉동 · 천왕동과 접하며, 서쪽으로는 온수동 및 경인선철도를 경계로 궁동과 접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항동과, 북쪽으로는개봉동과 접하고 있다. 이처럼 오류동은개봉동 · 궁동 · 온수동 · 항동 · 천왕동 등에 둘러싸여 있는 관계로 이 6개동의 중심 역할을 맡고 있다.

옛지명

오류골

오류동의 동네 이름의 연원이 된 오류골은원래 오동나무와 버드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오류골의 위치는현재 경인로 남쪽변 동부제강 서울제강소(오류동 123번지) 일대이며, 그서쪽은 현재 서울가든빌라 앞 부근이 된다.

주막거리

경인로 덕산병원 부근을 옛날에는 덕고개라불렀는데, 이 고개는 경인로 확장과 남부 순환로의 개설로 인해 이 두도로가 교차하는 오류 인터체인지로 변했다. 개봉 · 고척 지역에서 이고개를 넘어 오류동과 인천으로 가는 유일한 고개로 대보름에는이곳에서 불놀이를 하였다고 하며, 부근의 마을을 덕고개 마을이라부른다.

안오류골

가린열은 고척동과 경계가 되는 개봉동의중앙에 위치한 곳으로 갈대가 많고 여울이 많은 곳이라 하여 가린여울또는 가린열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칡과 같이 여러 갈래의개천 즉 개봉천 · 오류천 · 개웅천이 안양천과 합수되어 여울이 많다 하여갈탄(葛灘)이라 하였다 한다. 이곳은 갈대가 많고 넓은 습지였던 곳으로수리조합이 있었는데, 지금의 개봉배수펌프장이 있는 곳으로 옛날 물을조절하던 수리조합의 펌프장이었다. 가린열은 아래의 부누꿀과 광주물을포함하는 지역이었다.

가린열

가린열은 고척동과 경계가 되는 개봉동의중앙에 위치한 곳으로 갈대가 많고 여울이 많은 곳이라 하여 가린여울또는 가린열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칡과 같이 여러 갈래의개천 즉 개봉천 · 오류천 · 개웅천이 안양천과 합수되어 여울이 많다 하여갈탄(葛灘)이라 하였다 한다. 이곳은 갈대가 많고 넓은 습지였던 곳으로수리조합이 있었는데, 지금의 개봉배수펌프장이 있는 곳으로 옛날 물을조절하던 수리조합의 펌프장이었다. 가린열은 아래의 부누꿀과 광주물을포함하는 지역이었다.

보롱메(보름외)

부누꿀은 가린열 북쪽마을로 지금의성아단지 아래쪽 개봉노인정과 개봉1동 새마을금고지역으로, 옛날에는이 지역이 구릉지로 자두밭이었는데 매립하여 성아단지를 조성하였다. 뒷산인 가녈봉(일명 갈탄봉)을 부누꿀 뒤쪽에 있는 산이라고 하여부누꿀산이라고도 불렀다.

응골(엉꿀)

가린열 여울이 지금의 청실아파트,미주빌라, 개봉역 주변에서는 광주리에 물을 퍼담는 형상과 같이 되므로광주물이라 불렀다고 한다. 혹은 이 지역에 물이 많이 모인 까닭에 넓은연못이란 뜻에서 광지(廣池)라고 한 것이 변하여 광지물 또는 광주물이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와 같이 가린열, 광주물은 여울과 관련이 있는동네로 물과 인연이 깊은 동네이며, 마을의 형성 이후 경인로가 확장개설되어 주택가보다 길이 높았으므로, 안양천의 역수로 여름철이면곧잘 침수를 당하곤 하였다. 이러한 수해를 막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투입하여 개봉빗물펌프장을 확장 신설하여 수방대책에 만전을 기하고있다.

버들이 마을

가린열 여울이 지금의 청실아파트,미주빌라, 개봉역 주변에서는 광주리에 물을 퍼담는 형상과 같이 되므로광주물이라 불렀다고 한다. 혹은 이 지역에 물이 많이 모인 까닭에 넓은연못이란 뜻에서 광지(廣池)라고 한 것이 변하여 광지물 또는 광주물이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와 같이 가린열, 광주물은 여울과 관련이 있는동네로 물과 인연이 깊은 동네이며, 마을의 형성 이후 경인로가 확장개설되어 주택가보다 길이 높았으므로, 안양천의 역수로 여름철이면곧잘 침수를 당하곤 하였다. 이러한 수해를 막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투입하여 개봉빗물펌프장을 확장 신설하여 수방대책에 만전을 기하고있다.

텃골

하나님의 교회 신학교 뒷산인 학산은개웅산과 매봉을 잇는 중간에 있는 얕은 능선이라고 볼 수 있는자은산으로 좌우로 경인선 철도와 남부순환로, 경인로가 동서로횡단하는 주요한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산은 6 · 25동란 당시에수도권 지역이 북괴에 점령당하였을 때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의성공으로 인천과 부천을 탈환한 UN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해 올 때 인천과수도서울을 잇는 중요한 병참보급로였으며 기계화부대의 유일한 통로구실를 하였다. 이곳에서 북괴군은 최후 저지선을 구축하고 끝까지저항하였으나 UN군은 이를 어렵게 격멸하고 영등포 노량진을 넘어서울을 장악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 학산을 점령하면서울로 가는데 아무런 장애물이 없고 시야가 한 눈에 들어오는요충지이기 때문이다. 그 이후 이 산은 예비군 전술훈련장으로사용되다가 남부순환로가 개통되면서 따로 떨어진 섬과 같은 작은산으로 남아 있다.

명물 및 명소

유순정 묘

고척동에는 옛날에 바위가 울었다 하여우렁바위 또는 명암(鳴岩)이라고도 하고 길마바위라고도 하는 바위가있다. 양천구 목동과의 경계 지점에 있는 이 바위의 모습이 마치 감투나사모처럼 생겨 감투바위, 사모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옆에는말안장 처럼 생겨 안장바위 또는 의자 바위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다. 바위는 그리 크지 않으나 높은 산이 없는 이 지역에서는 그 중 큰바위에 속하는 것이다. 지금은 이 바위들을 목동아파트 단지 물탱크가있는 곳으로 옮겨놓았으나, 1988년까지만하더라도매년 10월 초하루에는이 바위에서 동네의 번영과 평안을 축원하는 도당제(都堂祭)를 지냈다고한다. 부근에 약수터가 있어 주민들의 산책로로 이용되고 있다.

바가지우물

영등포교도소와 영등포구치소가 인접한고척동 103-4번지에는 청계천 주변에 밀집해 있던 기계공구상가를외곽지역에 분산한다는 시책 아래 기계공구상가들이 이전해 왔다. 고척공구상가라 명명된 이곳은 건물 3동으로 이루어져 각종산업용품들의 도소매가 이루어지고 있다. 전기 · 전자용품 등의 부속품과각종기계용품을 판매하는 이곳에서는 1990년초부터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시장 상가 건물의 옥상을 주차장으로 개방함으로써 주차난해소에도 한몫을 하고 있으며, 공구상가가 들어서면서부터 번화해진고척동은 경인로와 경인전철이 지나가고 있어 한적했던 이곳이 이전과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번잡해졌다. 이로 인해 공구상가의 주변에는많은 아파트가 들어서서 동의 면모를 일신시키고 있다.

동정 성모 수도회

구로구의 유일한 대학인동양공업전문대학(東洋工業專門大學)은 고척교를 건너 안양천변의고척동 62번지 160에 자리잡고 있다. 1939년 4월 1일 동양공과학원으로설립되어 공업기술인 양성을 시작하였다가, 1965년 동양공과전문학교로바뀌면서 보다 전문적인 공업인을 육성하다가 1974년 2월에동양공업전문학교로 개편하여 대학교육을 시작하였다. 1980년에공업전문대학으로 승격된 이 학교는 효성그룹이 재단으로 되어 있으며 졸업생들은 특히 전자 · 전기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1953년 5월 19일에 설립한 동양공업고등학교가 노량진에서 이전하여같은 캠퍼스 내에 있다.

천왕동

연혁 및 동명의 유래

천왕동(天旺洞)은 조선 영조 때 부평도호부천왕리였다가 1895년 5월 26일 인천부 부평군 수탄(곡)면 천왕리가되었으며, 1896년 8월 4일 경기도 부평군 수탄면 천왕리가 되었고,1914년 3월 1일에 경기도 부평군 계남면 천왕리가 되었다. 1931년 4월1일에는 경기도 부천군 소사면 천왕리로 되었고, 1941년 10월 1일에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천왕리로 되었다가, 1963년 1월 1일에 서울특별시영등포구 오류출장소 천왕동으로 서울시에 편입되었다. 이 때 천왕동은항동과 함께 오류동사무소에서 행정을 담당하였다. 그 뒤 1968년에오류출장소가 폐지됨에 따라 천왕동은 영등포구의 직할이 되었으며,1975년? 따라 천왕동은 오류2동사무소에서 행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1980년 대통령령에 의해동작구와 구로구가 신설됨에 따라 천왕동은 구로구의 관할이 되어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왕동이란 명칭은 동네 뒷산이 굴봉이고 굴봉산 골짜기에천왕사(天旺寺)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절 아래 마을이란 뜻에서천왕골 또는 천왕리로 불려진 것이다.

위치 및 연혁

천왕동은 동쪽으로는 개봉동과 경기도광명시 광명동에, 서쪽으로는 항동과, 남쪽으로는 광명시 옥길동과, 북쪽으로는 오류동과 각각 접하고 있다. 대부분의 지역이 야산과 논밭으로 이루어져 있어 아직도 한적한 농촌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곳이다. 법정동이기는 하지만 인구가 적어 행정적으로는 오류 2동에속해있다.

옛지명

천왕골

이 마을은 조선 세종 때 영의정(領議政)을지냈던 경재(敬齎) 하연(河演)의 후손인 진주(晉州) 하씨(河氏)들이개척하였다. 하연의 5세손이 되며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던하백연(河白蓮)이 조선 명종 초에 이 마을을 개척하였고, 그 아들하경청과 하계청도 이 마을에 정착한 후 관계로 진출하였다. 이때부터시작된 진주 하씨의 천왕동 거주는 지금까지 15대를 이어내려온다.

연지마을

천왕동 길이 천왕고개를 넘어서 동쪽 방향인왼쪽의 염주봉(연지봉) 기슭을 따라 가면 동쪽으로 연지길이 갈라져나가는데 서울과 광명시의 경계인 광명길이 된다. 연지길을 따라 위아래로 마을이 들어서 있는데, 연지봉의 남쪽 기슭이라하여연지마을이라고 부른다.

천왕고개부터 시작된 천왕길은 좁지만 이 길을 따라 가면 광명시광명동과 옥길동까지 연결된다. 이 천왕길의 사거리에서 서쪽으로들어가면 천왕골 가운뎃말을 지나 웃말로 들어가는데 좀더 깊숙하게들어가면 광명시와의 경계하천인 너부대내에서 흘러들어 온 물로이루어진 자그마한 저수지가있다. 일제말부터 풍치지구로 지정되어개발제한 구역인 까닭에 취락구조개선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대개는낡은 무허가 건물이거나 비닐하우스로 대신한 집에서 주민들이거주한다.

부평말

천왕동에는 건너마을과 아랫뜸처럼 생긴작은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남쪽의 광명시와 접하고 있으므로 지난날부평군의 끝마을로 시흥군과 접해 있다는 뜻으로 "부평말"이라 하였다.지금은 세 집 정도만 남아 있다.

굴봉

천왕동 웃말의 뒤쪽에 있는 봉우리로항동과의 사이에 있는 삼각산의 북쪽 봉우리로서 높이 142.5m이다. 동쪽으로 높이 105m의 봉우리와 이어진다.

도당골

천왕동 웃말의 뒤쪽에 있는 봉우리로항동과의 사이에 있는 삼각산의 북쪽 봉우리로서 높이 142.5m이다. 동쪽으로 높이 105m의 봉우리와 이어진다.

벌뚝

천왕동 앞 너부대내 안쪽에 있는 둑. 농사를위주로 하던 시절에 농사철이 다가오는 봄철에는 너부대 마을 사람과천왕골 사람이 한데 모여 힘을 합쳐서 둑을 쌓아 물 공급원의 마련을위해 힘썼다고 한다.

뷩골

전에 부엉이가 깃들었던 골짜기라서 이러한이름이 붙었다. 굴봉 산봉우리 바로 밑의 골짜기가 된다.

사거리

천왕굴 가운뎃말에 있는 네거리. 군자, 오류, 광명시, 천왕동으로 통하는 길거리가 된다.

숫돌고개

천왕굴 가운뎃말에 있는 네거리. 군자, 오류, 광명시, 천왕동으로 통하는 길거리가 된다.

모이안밭

천왕굴 가운뎃말에 있는 네거리. 군자, 오류, 광명시, 천왕동으로 통하는 길거리가 된다.

염주봉(연지봉)

천왕굴 가운뎃말에 있는 네거리. 군자,오류, 광명시, 천왕동으로 통하는 길거리가 된다.

명물 및 명소

천왕동 은행나무

진주 하씨에 이어 이 마을에 정착한사람들은 조선 숙종 말년 무렵 이 곳에 정착한 청주(淸州)한씨(韓氏)들이다. 천왕동에서 약간 떨어진 지금의 부천시 원미동일대에 터를 잡아 집성부락을 이루어 살고 있었던 청주 한씨들 중의일부가 비옥한 이곳으로 옮겼다고 추측된다. 청주 한씨의한경홍(韓景弘)이 18세기 초에 이곳에 정착하면서 심은 나무가 마을어귀에 서있는 은행나무이다. 이 나무의 수령은 최소 270∼300년이되었다고 추측되므로, 숙종 43년(1717)에 태어난 한경홍이 심은것이라고 볼 수 있다.

노승의 묘

진주 하씨에 이어 이 마을에 정착한사람들은 조선 숙종 말년 무렵 이 곳에 정착한 청주(淸州)한씨(韓氏)들이다. 천왕동에서 약간 떨어진 지금의 부천시 원미동일대에 터를 잡아 집성부락을 이루어 살고 있었던 청주 한씨들 중의일부가 비옥한 이곳으로 옮겼다고 추측된다. 청주 한씨의한경홍(韓景弘)이 18세기 초에 이곳에 정착하면서 심은 나무가 마을어귀에 서있는 은행나무이다. 이 나무의 수령은 최소 270∼300년이되었다고 추측되므로, 숙종 43년(1717)에 태어난 한경홍이 심은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연세사회복지관

천왕동 13번지 36호에 자리한 사단복지법인연세사회복지관은 해방 후 극도로 혼란한 시기인 1948년 고 EthelUnderwood 부인에 의해 부모를 잃고 방황하는 고아와 시골에서 무작정상경한 청소년들 중 특히 유혹에 빠지기 쉬운 소녀들을 대상으로 기독교정신 아래 그리스도의 사랑과 절제정신을 가르켜 사회에 유익한여성으로 육성시키고자 하는 취지의 기독교 절제소녀관으로 처음설립되었다고 한다. 현재여자아동만 57명 양육하고 있는 이 복지관은1949년 3월에 설립자가 공산당 청년에게 피살당하고 1949년 8월에재단법인 기독교 절제소년관으로 개칭하였으며, 1981년 4월사회복지법인 연세사회복지관으로 개칭 승인 받아 연세의료원의도움으로 지역사회를 위한 무료 진료소를 개설하였다.

소사천왕참외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곳 천왕동은복숭아의 손꼽히는 명산지였다. 천왕동이 소사읍(素砂邑) 관할이었을 때소사복숭아는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과일이었고 그 중에서도 이곳 천왕동일대에서 재배되는 복숭아를 우선으로 쳤다. 포도 역시 신맛이 없고알맹이가 작지만 촘촘하게 매달린 이곳의 작물을 으뜸으로 쳤기에유명하였다. 특히 참외의 경우 함경도 함흥에까지 공급되어 「소사천왕참외」라면 웃돈을 주고 까지 거래되었다고 한다.

향동

연혁 및 동명의 유래

항동(港洞)의 연혁을 살펴보면 조선 영조 때부평도호부 항리였다가 1895년 5월 26일 인천부 부평군 옥산면 항리가 되었다가, 18996년 8월 4일 경기도 부평군 옥산면 항리가 되었으며, 1914년 3월 1일에 경기도 부평군 계남면 항리가 되었다. 1931년 4월1일에는 경기도 부천군 계남면 항리로 되었고, 1941년 10월 1일에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항리로 되었다가, 1963년 1월 1일에 서울특별시영등포구 오류출장소 항동으로 서울시에 편입되었다. 이 때에 항동은서울특별시조례 제276호(1962년 12월 28일 공포)에 의해 영등포구오류출장소 관할의 수궁동(水宮洞)사무소에 궁동 · 온수동과 함께편입되었다??해오류출장소를 없앰으로 인해 영등포구의 직할동이 되었다가, 1970년 5월18일에는 서울특별시조례 제613호 (1970년 5월 5일 공포)에 의해수궁동사무소를 없애고 오류동사무소에서오류동 · 천왕동 · 항동 · 궁동 · 온수동의 행정을 맡았다.

1975년 10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 제981호(1975년 9월 29일 공포)에의해 오류동사무소가 오류1동과 오류2동으로 나뉘게 되었는데 항동은오류동 일부 지역과 함께 오류2동사무소에 속하게 되었다. 1980년 4월1일 대통령령 제9630호(1979년 9월 26일 공포)에 의해 영등포구에서구로구가 분리 신설되자 오류2동은 영등포구의 관할을 벗어나 구로구의관할이 되었으며 항동도 자연히 구로구의 지역이 되었다.

항동이란 동명의 연원에 대하여는 풍수지리학적으로 마을의 형태가배 모양이므로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마을이름에 "항(航)"이란 글자가 들어 있는 마을은 옛 부평의 땅에 두 곳이있을 뿐인데 경기도부천시 소사동을 중심으로 동쪽에 있는 곳은구로구의 항동이고, 서쪽에 있는 곳은 인천시 북구 부개동에 딸린마을인 항동(港洞)이다. 이 중 인천의 항동은 이곳이 부평군 군내면의관할이 될 때까지는 항동이었다가 나중에 일신동(日新洞)의 한 마을인항동(港洞)으로 바뀌었으며 그후 부개동(富開洞)의 자연부락이 되었다. 따라서 항(港)자가 들어가는 마을은 이곳 구로구의 항동 하나만 남게 된것인데, 옛날이곳 일대가 바다처럼 물이 많을 때 배가 마을에닿았으므로 항동이라 했다는 전설적인 해석도 있다. 천왕동의너부대내와 소래(蕭萊) 쪽의 낮은 곳은 해발 10m 내외이므로 이러한전설적인 해석도 전혀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위치 및 연혁

항동은 북쪽으로는 오류동과, 동북쪽으로는천왕동과 접하고 있으며, 남동쪽으로는 시흥군 옥길동과 경계이고서쪽으로는 부천시에 접하고 있다. 이처럼 부천시 범박동 · 괴안동과인접하고 광명시 옥길동과 경계가 되고 있는 항동은 전형적인 농촌모습을 하고 있어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 비율이 높고 주민들의 숫자가전체 면적에 비해 매우 적은 편이다.

옛지명

항골

항도의 서남쪽으로 경기도 부천시 범박동과경계가 되는 몰미산이 있다. 범과 같은 모양의 바위가 마을 어귀에있음으로 인해 범바위골이라는 동명이 붙여졌고, 다시 범박골로변하였다가 범박동이 된 곳이다. 이 범박동에서 항동으로 가려면배모퉁이처럼 튀어나온 산등성이를 돌아가야만 된다. 이 모퉁이 근방에몇백년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을축년(乙丑年) 대홍수 때에소사펄이 물바다가 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피난을 가기 위해 뗏목을만들어 타고 내려오다가 이 나무에 배를 매어두고 정착하면서부터동네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시흥군의 과림저수지(果林貯水池)로들어가는 물길이 구로구의 항동 · 천왕동과 부천시 범박동에까지 이르고있고, 또 완만한 산비탈의 경사지대에 마을이 형성되는 일반적인 취락형성의 구조로 본다면 이 배못탱이는 범박동이 아닌 항동일 것으로여겨진다.

망골

개척지마을 위쪽에 있는 골짜기로개척하기가 무척 힘이 들었든지, 여기에 살면 망하겠다고 해서 붙여진이름이라 전한다. 이 망골 앞의 들, 곧 몰미산이 ㄷ자로 둘러싸고 있는들을 망골들이라고 부른다.

서낭당고개

항동에서 삼각산과 건지산 사이의 봉우리를향하여 넘어 천왕동으로 가는 고개다. 이 고개에 서낭이 있으므로붙여진 이름이며 웃당골이라고도 부른다.

앞내깔

시험장 저수지에서 천왕동 앞으로 흘러옥련동으로 나가는 내를 앞내깔이라고 한다. 이 내의 양쪽에 논이 있어앞내깔들이라고 부른다.

절알

"절 앞"이 변하여 된 말이다. 굴봉 서쪽기슭에 절이 있었다고 하며 그 절 앞이 되는 골짜기인데 약수터가있다.

벌뚝

천왕동 앞 너부대내 안쪽에 있는 둑. 농사를위주로 하던 시절에 농사철이 다가오는 봄철에는 너부대 마을 사람과천왕골 사람이 한데 모여 힘을 합쳐서 둑을 쌓아 물 공급원의 마련을위해 힘썼다고 한다.

명물 및 명소

수문장 느티나무

마을의 입구인 옛날 농사시험소의 앞 마당에수고 12m, 나무둘레 1.2m에 달하는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일제말에 측정된 이 나무의 당시 나이가 350여년이라 했으므로 지금은400년쯤 된다. 이 느티나무는 마을의 수문장인 셈이다. 이 나무를중심으로 동쪽은 차츰 지대가 낮아져 평야가 전개되고 있으며 이 벌판을따라 안양천의 지류인 목감천이 흐르고 있다.

주거환경개선지역

와우산 아래에는 일제 때에 노량진 철길주변을 정리할 때에 철거민들이 이곳으로 들어와 집단으로 부락을만들어 살았기 때문에 철거민촌이라고 한다. 이때 마을 입구에 있던성공회에서 많은 지원을 하여 이들 철거민들이 정착하여 야산과 잡초로이루어진 들판을 개척했기 때문마을은 항동의 거의 모든 지역이 그러하듯 그린벨트로 지정되어있기 때문에 개발을 할 수 없었으나 철거민촌인 개척마을만은 주거환경개선지역으로 1989년 12월 30일 부로 지정되어 면적 8,730㎡에 18평형연립주택 146세대를 건립하게 되었다.

항동저수지와 원종장

항동은 지리적 요건으로 인하여 일찍부터농업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대부분의 항동 거주민들은 농업과 밀접한연관을 맺고 살고 있다. 항동의 한 가운데에 있는 항동저수지는 이러한지리적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1917년 4월 경기도 부천군 계남면 벌응절리에 농촌진흥사업을 위한경기도 종묘장이 세워져 역곡동, 항동, 괴안동의 들판에 대한농촌진흥사업이 전개되었다. 1932년 10월 1일 경기도 농산물 원종장은경기도 농사시험장으로 개칭되었고, 1957년 2월 2일에 다시 경기도농사원으로 되면서 농사지도사업을 비롯한 농사 연구사업을 벌림으로써농촌사업 진흥기관이 되었다. 1963년 4월 1일 농촌진흥법에 따라농촌진흥원과 원종장에서는 새로 개발한 벼품종인 「유신」,「밀양21호」, 「밀양22호」의 보급은 물론 각종 원예와 채소 및 과채류재배, 기술개발 혁신, 논보리의 경작에 이어 벼농사를 이어가는 등농사진흥사업을 활발히 전개했으나 이제는 그런 자취를 찾아보기어렵다.

항동저수지는 1973년 경 이곳 항동 32번지 근처에 있던 보(洑)크기의 저수지를 수면면적 8천여평의 저수지로 개조한 것이다. 인근42,000평의 논에 농사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성공회대학교

항동 1-4번지에는 대한성공회대학교가 있다. 이 학교는 1914년 4월 30일 강화군 관청리에 성미가엘 신학원으로개교하였으나, 그 뒤 여러 차례의 이전을 거쳐 1957년에 지금의 자리에학교 부지를 매입하여 교사를 신축하여 1961년에 개교하였다. 1987년1월 17일에는 4년제 대학 학력을 인정받는 학교로 바뀌면서 1989년3월에는 대한성공회신학교로 개명하였다. 신학 석사과정은 일반대학의학사학위를 가진 사람을 입학시켜 3년간의 신학 기초교육을 시키는신학교육의 새 체제를 도입하는 혁신적인 것이다.

한편 대한성공회 유지재단에서는 1973년 1월 26일 항동 1번지에정신지체아 특수학교인 성베드로학교를 설립하여 1975년 2월 15일개교하였다. 그리스도 정신에 입각하여 종래 정신지체아동 시설의기능을 보완하여 아동복지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일반 가정에서양육 · 보호하기 어려운 정신지체아를 수용 · 보호하고, 지적 능력이 낮은아동을 위한 특수교육을 내에서 개발하여 건전한 생활과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기초 지능을 습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 학교의 설립 목적이다.

유한공고

항동 10-8번지에는 유한공업고등학교가있는데 이는 1964년 10월 2일 유한양행에서 합리적 경영에 의한이익금을 교육에 투자하여 인재 양성을 하겠다는 취지 아래 세운것이다. 본교의 부지는 항동과 부천시에 걸쳐서 있다.

항동 토마토

논이 많고 낮은 산들로 이어진 항동은일찍부터 농사가 발달하였다. 참외, 수박, 복숭아, 포도 등 특산물이많았던 항동에 농사시험장이 생기면서 그 덕을 톡톡히 본 것 같다. 특히일년감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우는 토마토는 항동의 특산물 중에서도손꼽히는 것이었고 이 토마토는 궁중에까지 진상되었다. 붉고 알이 가득차 있으며 차진 이 토마토는 맛이 달아 항동 사람이면 누구나 토마토를재배하였고, 이 토마토를 사기 위하여 먼 곳에서 이른 새벽부터 와서줄을 서서 기다렸다고 한다. 찰토마토의 크기도 커서 한 개의 크기가보통 배만 하였기 때문에 충분히 요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재배하는 집도 줄어들었고 각 지역에서 재배를 많이 하기 때문에 옛날만큼 명성을 날리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항동 토마토는 여전히이름이 있어 토마토를 재배하는 사람들에게는 우선적으로손꼽힌다.

온수동

연혁 및 동명의 유래

온수동은 조선 영조 대에 부평도호부온수리였다가, 1895년 5월 26일에 인천부 부평군 수탄(곡)면 온수리가되었으며, 1896년 8월 4일에 경기도 부평군 수탄면 온수리로, 1914년3월 1일에는 경기도 부평군 계남면 온수리가 되었고, 1931년 4월1일에는 경기도 부천군 소사면 온수리가 되었으며, 1941년 10월 1일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온수리, 1963년 1월 1일에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오류출장소 온수동으로 변천되어 왔다. 오류출장소 관할에서는 폐지됨에따라 영등포구의 직할동이 되었다.

1970년 5월 18일 서울특별시조례 제613호에 의해 수궁동사무소가폐지되고, 온수동사무소의 관할이 되었으며, 오류동사무소가 1975년 10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제981호에 의해 오류 1동과 오류2동으로 분동될 때 온수동은 오류동일부지역과 궁동과 함께 오류1동사무소의 관할이 되었다. 1980년 4월1일 대통령령 제9630호에 의해 구로구가 영등포구에서 분할 신설됨에따라 자연히 구로구 관할이 되었고, 1988년 7월 1일에 분리하여 다시수궁동을 설치함에 따라 수궁동 사무소의 관할 구역이 되었다.

온수동이라는 동명은 온수골에서 유래하였는데 옛날 이 지역 일대에서더운 물이 나왔기 때문에 온수골이라 하였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약300년 전에 물이 나왔다고 하나 이는 막연한 전설인 것 같다. 세종실록에는 온수동의 온천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부평도호부를 현으로 강등했다. 임금께서 부평에 온천이 있다는 말을들으시고, 조정의 신하를 여러 차례 보내서 찾아 보라고 했으나 그곳아전과 백성들이 숨기고 말을 듣지 않으므로 도호부를 폐하고 현으로강등했다. (『世宗實錄』권83, 世宗 20년 11월 8일)

위의 기록으로 보아 피부병으로 일찍이 온양 등지로 온천욕을 다녀와효험을 본 세종임금이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온천할 곳을 찾기위하여지명이 온수(溫水)인 이 지역으로 사람을 보내 온천을 탐색하도록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온천을 발견하지 못하고 이에대한 문책으로 도호부를 현으로 강등시키고 말았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그곳 아전과 백성들이 숨기고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 대목이주목된다. 이에 대해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일단 온천수가 나오면온천욕을 하기 위해 많은 피부병환자들이 몰려들어 주민들에게 불쾌감을주고, 또 넘쳐나온 온천수는 논에 극심한 피해를 주기 때문에 주민들이온천수의 맥을 흙과 돌로 막아 버리고 물구멍이 있다는 사실 조차도숨기고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온천에 전 다리 모여들 듯", "온양온천에 헌다리모이 듯" 한다는 속담이 있음으로 보아 의술의 발달이 상대적으로미약했던 과거에는 온천욕이 피부병 치료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고,따라서 온천이 나온다고 하면 많은 피부병환자들이 몰려들게마련이었다. 더군다나 왕이 다녀갈 정도로 소문이 난다면 전국에서 많은환자들이 몰려올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현지의 주민들이이를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 지역에 온천수가 나온 것은 세종 대왕대 이전으로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후 온천의 개발은 일제시대일인들이 1920년대에 온천개발사업에 착수하였다는 데서 찾아볼 수있다. 그러나 일인들은 여기 저기 땅을 파면서 많은 경비만 투입한 채수맥을 찾지 못하여 실패하였다. 그 뒤에도 온천에 관한 관심은여전하여 1969년과 1970년에도 온천시추작업을 하였으나 수맥을 찾지못하였다. 1985년에도 새로운 장비로 시추작업을 하였으나 온천수를개발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위치 및 연혁

구로구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온수동의동쪽은 궁동과 접하고 있고, 그 경계선이 수궁동길을 지나 남쪽으로경인국도까지는 오류동과 접한다. 남쪽은 경인국도의 중앙선이 되어오류동과 만나고, 서남쪽 귀퉁이에서는 경인로를 지나 남쪽 부분이항동과 접한다. 서쪽은 경기도 부천시 역곡동과 접하며, 북쪽은 부천시성곡동의 까치울과 접하고 있다.

더운 물이 나왔다는 곳은 온수동 가운데서도 온수골(옷수골이라고도한다)인데 지금의 한국콘베어공업주식회사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뻗어있는 곳으로 북쪽은 부천시 여월동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줄기 남쪽이고,남쪽은 온수전철역 앞 세풍운수주식회사 버스 종점 앞 거리이다. 서쪽은영등포 기계공업단지(일명 온수공단) 산등성이 동쪽, 동쪽은 텃골 위의산등성이 서쪽이 된다.

옛지명

텃골,온수골,능안

텃골에는 조선왕조 세종(世宗)임금의 열셋째왕자인 밀성군(密城君)의 차자(次子) 춘성군(春城君)의 후손들이 살고있다. 조선왕조 초 왕세자이었던 의안대군(宜安大君)이 후사 없이세자시에 별세하자 춘성군(春城君)을 대군의 봉사손(奉祀孫)으로정하였다. 그 후 춘성군의 5세손인 이양(李暘)이 1640년대 말(仁祖 말,孝宗 초)에 이곳으로 낙향하여 정착함으로써 전주이씨의 집성촌이형성되었다.

온수골 서북쪽 보름뫼 기슭으로 서융전기주식회사 뒤쪽을 능안이라고하는데 영등포 기계공업단지가 형성된 것이다. 능안은 왕릉이 있는골짜기의 안이라는 뜻인데, 온수동 약수터가 있는 골짜기 일대는 신라말 고려 초에 호족들이 정착해 살면서 능이 생겨났기 때문에 붙여진이름이라고 한다. 이 곳 주민인 이중학(李重學; 온수동 13-2)씨의기억에 의하면 일제 때에 능안의 고분을 파본 결과 석곽과 토기 등의많은 유물이 나왔는데 이 중 중요한 유물은 총독부에서 가져가고나머지는 발굴 참여자들이 가져갔다고 한다.

개건너(해방촌)

온수골 동쪽 곧 텃골 동쪽 개천 건너에 있는마을이다. 이 곳은 텃골 앞으로 지나는 경인선 너머 개울 건너가 되므로이런 이름이 붙었다. 지금 대흥빌라 동쪽 성원연립 옆이 된다.

도당재고개

온수골에서 온수연립주택 단지인 삭새로넘어가는 고개로 원래는 삭새고개로 불리웠으나 도당이 있었기 때문에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온수골 안쪽에서 잡귀를 물리치고 마을의평안을 빌던 곳이다. 도당산의 높이는 102m이고 온수연립 가압장 자리가정상에 해당된다. 도당산은 전주 이씨의 선영이다.

독장이고개(덕정)

경인국도변에 있고 고개로 옛날 옹기를구워서 팔던 독점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도로가 확장되고 지형지물이많이 변동되어 정확한 지점은 알 수 없다.

동그란산(벽산/시루봉)

지금 온수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는 곳을옛날에는 동그란산 또는 벽산이라 하였는데, 모양이 마치 시루를 엎어놓은 것과 같아서 시루봉이라고도 한다. 높이는 약91m이며, 철길옆이라해서 철마산(鐵馬山)이라고도 한다.

안산

터골 남쪽에 있는 산으로, 터골 앞 경인선건너에 있는 길쭉한 산인데 높이는 약 58m 이며 부천시 역곡동과의경계선상에 놓여 있다. 지금은 동진 · 성원 · 대흥빌라가 들어서있다.

명물 및 명소

온수연립단지

1977년 4월에 당시 공사비 12억 2천만원으로온수동 우신중 · 고등학교 북쪽 그린벨트지역에 인접한 온수동산12-1번지와 산 4-1번지 일대 9,865평의 대지 위에 12평형 4가구연립식의 151동 604가구의 연립주택단지가 조성되면서 새로 길이생겼다. 상가, 점포, 어린이놀이터, 파출소 등의 부대시설과 함께 2차분160가구의 연립주택을 건립하여 무허가 철거민에게 우선 입주권을분양하여 동년 9월부터 입주하자 경인선과 나란한 온수연립주택단지까지버스길이 났다.

온수공단(영등포 기계관리공단)

온수동 100-26번지에는영등포기계관리공단(永登浦機械工業管理工團)이 있다. 세칭온수공단(溫水工團)이라고도 하는 이곳의 총면적은 온수동 128필지와함께 부천시 역곡동 24번지의 32필지를 포함하여 155,541㎡이다. 1968년3월 12일 사단법인 영등포공업인협회(永登浦工業人協會)에서기계공업단지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가 1970년 4월 20일에는 동추진위원회를 해체하고 대신 영등포기계공단으로 개편하였으며, 같은 해11월 20일에 사단법인 영등포기계공단을 상공부 허가 제161호로인가받았다. 1973년 8월 3일에는 상공부 공고 제7511호로 기계공업 및비철금속(非鐵金屬) 적격단지로 지정을 받았으며 동년 8월 24일에는일본 도야마현(當山縣)의 기계공업센터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이어다음해 5월 9일에는 숭전대학교와 산학협동 결연을 맺었고 1975년 12월31일에는 법률 제2843호로 공업단지관리법에 의한 공업단지로지정받았다.

1977년 5월 8일 공단 새마을중학교를 설립하여 이듬해 3월 1일개교함과 동시에 야간 특별학교도 문을 열었다. 1978년 산공부 허가250호로 영등포기계공업단지 관리공단으로 개편하여 지금에 이르는데,1989년 10월말 현재 입주업체는 146개소로, 조립금속이 143개소,석유화학 1개소, 제지 1개소, 섬유 1개소이고 전체 종업원 수는 약4,000명이다.

궁동

연혁 및 동명의 유래

궁동은 조선 영조 대에 부평도호부 궁리였다가, 1895년 5월 26일에인천부 부평군 수탄(곡)면 궁리가 되었으며, 1896년 8월 4일에 경기도부평군 수탄면 궁리로, 1914년 3월 1일에는 경기도 부평군 계남면궁리가 되었고, 1931년 4월 1일에는 경기도 부천군 소사면 궁리가되었으며, 1941년 10월 1일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궁리, 1963년 1월1일에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오류출장소 궁동으로 서울에 편입되면서동이란 명칭을 갖게 되었다. 오류출장소 관할에서는 온수동, 항동과함께 수궁동사무소에서 행정을 관할하였으나, 1968년 1월 1일오류출장소가 폐지됨에 따라 영등포구의 직할동이 되었다.

1970년 5월 18일 서울특별시조례 제613호에 의해 수궁동사무소가폐지되고, 궁동은 천왕동 · 온수동 · 오류동 · 항동과 함께 오류동사무소의관할이 되었으며, 오류동사무소가 1975년 10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제981호에 의해 오류 1동과 오류2동으로 분동될 때 궁동은 오류동일부지역과 온수동과 함께 오류1동사무소의 관할이 되었다.

1980년 4월 1일 대통령령 제9630호 의해 구로구가 영등포구에서 분할신설됨에 따라 자연히 구로구 관할이 되었고, 1988년 7월 1일에구로구조례 제59호(1988년 6월 23일 공포)에 따라 오류 1동에서 궁동과온수동만을 분리하여 다시 수궁동을 설치함에 따라 수궁동사무소의 관할구역이 되었다.

궁동이라는 동명은 조선 선조(宣祖)의 일곱째 정선옹주(貞善翁主)가이곳에 살던 길성군(吉城君) 권대임(權大任)에게 출가하여 살던 집이여기에 있었으므로 궁궐 같은 큰집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정선옹주가 이곳으로 시집을 오게되자 선조는 이 일대의 땅을사패지(賜牌地)로 하사하였다. 사패(賜牌)란 고려나 조선 때에 왕이왕족이나 공신에게 노비와 땅을 내려주던 것을 말한다. 따라서사패지(賜牌地)는공음전(功蔭田) · 사전(賜田) · 사패전(賜牌田) · 훈전(勳田) 등의이름으로도 불리운다. 이러한 땅은 대부분 세습되었는데, 사패지의넓이에 대해서는 "사방 10리" 또는 "밤에 촛불을 켰을 때 그 불빛이비치는 곳 모두"라고도 하는데 사패지는 주로 경기도에 많았다.

정선옹주가 시집간 안동 권씨 집안은 조선 선조 때에 세도가였으며권대임은 글씨를 잘 써서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예조판서를 지낸 충정공(忠貞公) 권협(權挾)의손자였던 까닭에 상당한 재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따라서 그들이 사는집은 궁궐처럼 크고 화려했으므로 인근 사람들이 이 마을을궁마을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는 마치 지금 서울의 소공동(小公洞)이태종(太宗)의 둘째 공주인 경정공주(慶貞公主)가 살던 곳이라서 소공주댁이라 부르던 것이 동네 이름이 된 것과 유사하다 하겠다.

위치 및 연혁

궁동은 구로구의 맨 서쪽 끝 온수동의북쪽에 위치한다. 따라서 서북쪽은 경기도 부천시 작동 · 여월동과산등성이를 경계로 닿아 있다. 동북쪽은 양천구 신정 3동과, 북쪽은신월 4동과 닿아 있으며 산등성이를 경계로 하고 있다. 서남쪽은온수동과 접하며 동쪽은 개봉동과 산등성이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갈라져 있다. 남쪽은 동부의 교통안전 진흥공단과 서부의우신중 · 고등학교 운동장을 잇는 턱거리가 마을 어귀를 이룬다. 이턱거리는 그 남쪽 오류동과의 경계에 수궁동 버스길과 경인철길이나란히 놓여 있어 일직선을 이룬다.

옛지명

갈매

옛날 갈대가 많이 났다는 골짜기이다. 현재의 온수연립단지로 갈골이라고도 한다.

궁골

궁동저수지 서남쪽으로 건너다 보이는 산 밑마을로 궁동 68번지 199호 일대이다. 원각사가 있는 쪽에서 뻗어 내려온산줄기 끝에 높이 87.5m와 86.3m의 두 봉우리가 있는데, 그 두 봉우리의동쪽 기슭에 있다. 이 마을 북쪽에 안동권씨 문중묘가 바라다 보이는데이 문중묘 너머 서서울정보산업고등학교 일대가 궁터이다.

댓골고개(수렁고개)

궁동에서 동북쪽 양천구 신정3동으로넘어가는 고개를 수렁고개라고 하는데, 이 고개를 넘으면 댓골의경주(慶州) 정씨(鄭氏) 문중묘가 있다. 정씨 문중묘가 있는 댓골은 조선태조 이성계가 개국 일등공신인 양경공(良景公) 정희계(鄭熙啓)에게내린 사패 땅으로 넓이가 20만 평이 넘는다. 댓골은 죽동(竹洞)이라고도하지만 원래 대나무가 있어서가 아니라 큰골이 변해서 된 말이 아닐까생각된다.

동이점골

옛날에 좋은 흙이 나서 동이(항아리)를구웠다는 곳이다.

불당골

궁동저수지 동쪽 관음사 북쪽 지점에 있다옛날에 불당이 있었다고 한다.

성짓골

궁동 어귀에서 북으로 곧게 뻗어 북쪽양천구 신정3동으로 통하는 길인 궁동길과 절터 서북쪽 부천시여월동으로 넘어가는 길인 수렁고개길과 갈라지는 골짜기이다. 권씨문중묘가 있는 고추 모양의 언덕 동쪽 깊숙한 사타구니 쯤에 자리잡고있다.

삭새고개

온수동 텃골에서 우신중학교 뒤를 지나궁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성짓골

궁동 어귀에서 북으로 곧게 뻗어 북쪽양천구 신정3동으로 통하는 길인 궁동길과 절터 서북쪽 부천시여월동으로 넘어가는 길인 수렁고개길과 갈라지는 골짜기이다. 권씨문중묘가 있는 고추 모양의 언덕 동쪽 깊숙한 사타구니 쯤에 자리잡고있다.

삭새고개

온수동 텃골에서 우신중학교 뒤를 지나궁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턱거리

궁골 마을의 어귀이다. 궁동의 동부로교통안전진흥공단 앞에서 온수동 세풍운수주식회사 버스종점까지 경인선철길과 나란한 버스길인 궁동길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수룬

현재 궁동마을회관 부근과 아랫마을을 말하며 전의(全義) 이씨 후손과 안동(安東) 권씨 후손들이 살고있다.

양지 말

현재 궁동교회 부근과 원각사 아랫마을로안동 권씨 후손들이 살고 있다.

명물 및 명소

정선옹주묘와 궁골

정선공주가 살던 집은 지금서서울정보산업고등학교 부근으로 이 일대를 요즈음도 궁터라고 하는데, 지금은 집의 형체조차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정선공주와 그의 부군인길성군 권대임의 무덤은 궁동저수지의 서쪽 끝 안동 권씨 묘역에자리잡고 있다.

유진오 별장

궁동저수지 뒷편에는 현민(玄民) 유진오(兪鎭午)의 소유 임야에토막집이 한 채 있었다. 일명 유진오 별장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집은지난 1989년 4월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인하여 불타 버리고말았다. 개축을 하려해도 이 지역 일대가 그린벨트인 관계로 건축허가가나지 않아 집을 개축하기 위해 가져다 놓은 벽돌만이 어지럽게 쌓여있을 뿐이다. 유진오 별장이 있는 곳 옆 길을 따라 약 2㎞ 정도 더 가면궁동 약수터가 있다. 유진오 별장 못미쳐 삼거리에도 유진오 집이라는별장 형태의 조그마한 양옥이 있다. 붉은 벽돌로 건축한 이 집의내부에는 페치카가 있어 마치 그림 속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집은 유진오가 거주하면서 글을 썼던 곳이고, 약수터 쪽의 별장은이따금 산책을 하며 기거하던 곳이라 전하다. 이곳은 지금 60대의 노인내외가 관리하고 있다.

원각사와 관음사

1960년 초에 궁동의 옛 절터에서 서남쪽등성이 84.5m지점에 원각사가 건립되었다. 절의 규모는 3간 단층대웅전이 절 아랫쪽을 향해 서있으며, 그 아래 서남쪽에는 육각정으로만들어진 종각(鍾閣)이 있고 한칸으로 된 산령각(山靈閣)도 있다. 이절의 특징은 산령각 남쪽에 시멘트로 만든 관음보살상이 2단으로 된연대(蓮臺) 위에 조성되어 있는 것이다. 와룡산의 중턱에 원각사가자리한 까닭으로 인해 멀리서도 이 관음보살상이 잘 보인다. 원각사의뒷산인 와룡산(臥龍山)이 풍수학적으로 남성적인 산이라 그런지 이절에는 남자 스님이 주지로 있다.

1970년대에는 궁동과 개봉동을 연결해 주는 높이 109m의 청룡산중턱에 관음사가 세워졌다. 원가사와는 대치되는 지점에 세워진관음사는 규모가 작지만 종각과 3간 단층의 대웅전이 있으며 역시시멘트로 저성된 불상이 경내에 있다. 미륵불을 조성한 이 불상은 까만기단 위에 다시 흰 연대를 만들어 그 위에 입상(立像)으로 세웠는데빨간색으로 입술연지를 한 것이 특색이다. 이 절의 뒷산인 청룡산이여성적이기 때문에 원가사와는 달리 비구니가 주지로 있다.

교통안전진흥공단

증기기관차가 다니기 이전까지는 경인국도와수궁동길이 갈라지는 어구에서 턱거리 사이 일대에는 오류동 간이역이있었다. 지금의 교통안전진흥공단 남쪽 오류동 331-25번지가 여기에해당된다. 이 오류골 간이역과 북쪽의 교통안전진흥공단은 옛날어린아이들이 전쟁놀이를 하며 지내던 곳이기도 하다. 위치로는오류동이었으나 이 오류골 간이역은 궁동 어귀의 바로 앞에 있었기 때문에 오류골 보다는 궁골 어귀의 사람들을 위한 역이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이 간이역은 그다지 활기를 띠지 못한 채 오류역으로 손님이모두 몰리게 되자 끝내 폐쇄되고 말았다.

1957년에는 궁동 턱거리 동쪽 산기슭에 국립원호병원이 들어섰다. 이원호병원에서는 상이군경 치료를 담당하였는데 근방의 공기가 맑을 뿐만아니라 공해가 적고 조용하여 병원으로서는 적격지였다. 그러나 시설이낡고 노하한 원호병원을 1983년에 강동구 둔촌동으로 신축하여옮겨가고, 이곳에 교통안전진흥공단이 들어섰다. 여기서는 자동차의안전검사와 함께 우수기업체의 안전관리자들을 대상으로 3월부터11월까지 4주 과정으로 안전관리에 관한 교육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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